[기획연재]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강창보 선생 투쟁사(2)

▲ 신인회 조직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5년 3월 19일자 기사.

  1922년 서울로 유학 후 1924년 가을부터 고향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때 마침 '소비에트'에서 낭인 생활을 하던 홍양명(洪陽明, 유년시 한문서당 동료)이 귀향하자 강 선생의 사상과 주변에는 커다란 변천을 일으켜 생애의 분기점을 결정하고 말았다.

바로 이 직전에 제주성내에는 '반역자구락부(叛逆者俱樂部)'라는 자연발생적인 모임이 있었는데 강령과 규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일제 통치에 반대하고 친일파 도배들의 아니꼬운 우월적 태도에 반감을 가진 청년들의 클럽이었다. 그 중심적인 성원들은 다음과 같다. 홍순일(洪淳日), 김택수(金澤洙), 한원병(韓元柄), 장종식(張鍾植), 장희순(張禧淳), 한상호(韓相鎬), 강 선생 등이었다.

그런데 귀도한 홍양명이를 통하여 새로운 ‘러시아혁명’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사회주의의 이론을 초보적이나마 깨닫게 되자 반역자구락부를 해소하면서 '신인회(新人會)'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주도에 있어서 사회주의운동의 효시였다. 조직의 멤버로서는 다음과 같다. 송종현(宋鍾鉉), 김택수, 한상호, 장희순, 홍순일, 강평남(康平南), 강창보.

그 당시 동경대학에서는 지하의웅(志賀義雄, 1927년 일본공산당원이며 공산당 탄압시 피검되어 옥중 18년을 살고 패전과 동시에 석방되었음)을 중심으로 한 사회과학 연구조직인 '신인회'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모방했던 것이다.

제주도에 정착해서 사회운동을 발전시키려면 일정한 직업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직업이 있어야 주위의 신뢰를 받고 경찰의 주목을 피할 수 있으며 조직 확대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송종현, 김택수, 강창보 3인이 민우당(民友堂)이라는 상점을 만든 것은 이상과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민우당은 후일 제주도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운동에 커다란 재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 제4차 조선공산당 야체이카 사건으로 강창보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송종현과 김택수
1925년에는 신인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송종현을 책임자로 하고 김택수, 한상호, 강창보, 장종식, 김병원(金炳媛), 오대진(吳大進), 김정로(金正魯), 윤석원(尹錫沅)을 중심성원으로 하는 당내 세포조직을 결성하였다. 당내 세포가 조직되면서 제주도의 사회주의운동은 획기적으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여 성내를 중심으로 외곽단체로서는 '제주도청년회', '부인회', '샛별소년단'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기타의 지방에는 역시 각종의 단체가 속속 결성되어 당의 지도에 의한 운동방침을 착착 구현시켜 나갔다.

강 선생은 한문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옛날 조선이 낳은 유명한 시인 김립(金笠)과 같이 야유적인 즉흥시를 잘 지어서 동지들을 조롱하곤 하였다.

같은 동지인 박찬규(朴燦圭)가 실연을 당했을 때 “大路洞上雹雨聲 芬蓮一蹴馬一蹴”이라고 작시하였으니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즉 대로동은 분연이가 거주하는 ‘배부른 동산’(큰길 이름), 박의 부친은 박우상(朴雨相)씨이다.

또 한 편은 조천에 사는 윤성종(尹性鍾, 후일 제주청년동맹 초대 위원장)이 성내 청년회관을 찾아왔을 때 술을 좋아하는 같은 일꾼 고원종(高遠鍾)이를 동반하여 장시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이것을 야유하여 다음과 같이 즉흥시를 지었다.
  “猩種引猿種 一去不复還 若非入夷手 必是殺獵銃”
[역주 : 성종(성성이, 윤성종을 말함)이 원종(원숭이, 고원종을 말함)을 끌어당겨 한번 가니 다시 돌아오지 않네.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는 필시 엽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네.]

1928년 8월 20일에 당 중앙의 방침에 의거하여 제주도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청년단체 총망라하여 중앙집권제로 조직을 개편하기 위한 제주청년동맹 결성대회가 모슬포에서 개최되었다. 이로써 제주도 운동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 대회가 끝나자마자 8월 25일에 당 세포는 검거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 야체이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강창보의 출소 직전 모습.1930년 12월 15일.
송종현, 김택수, 한상호, 김정로, 윤석원, 강창보 등이 경기도 경찰부에 압송 당하였다. 이 검거 선풍은 전국적인 규모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조선의 당은 거의 파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주 :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선생은 1930년도에 2년 징역에 3년간 집행유예의 판결을 받고 12월에 출옥하였다. 출옥하자마자 남아있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한시도 쉴 새 없이 동분서주하면서 재건사업에 착수하여 마침내 이익우(李益雨), 신재홍(申才弘), 오대진을 중심으로 하는 세포의 핵을 결성하였다(이때의 조직 이름이 '야체이카'다).

때는 마침 1931년이었다. 통찰력이 예민하고 포옹력이 넓은 선생은 단기간에 계획을 달성하였는바 이로써 그의 조직적인 두뇌와 능력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중앙과의 연계를 맺으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이 전면적으로 파괴된 뒤여서 뜻대로 안되고 다만 시기가 다가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활동을 중단한 것도 아니다. 선생은 후계자 양성에 힘을 경주하여 김두경(金斗璟, 주 : 1933년 제주도 적색농민조합 건립운동의 주역)이를 투쟁 대열에 인입시켰다. 후일 그는 유명한 제주축항노동자의 파업사건을 지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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