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혈에서 보성시장 순대까지 이도1동의 참맛을 보여드립니다

화사하게 거리를 물들였던 벚꽃이 떨어지니 나무는 연두색 새싹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었다. 거리가 온통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쌀쌀한 기운은 간데없이 사라지니 여름이 금방이라도 다가올 태세다.

짙은 나무그늘 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제주시내 중심지에도 있다.  그 중 한 곳이 삼성혈이 자리 잡고 있는 이도1동이다.  

▲ 모흥혈 삼성의 시조가 솟아 났다는 구멍이다. ⓒ 장태욱 

삼성혈은 고(高), 양(梁), 부(夫) 삼성의 시조인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가 태어난 곳이며, 이도는 그 중 양을라의 가족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고 알려진 고을이다. 당시 삼을라가 서로 거처를 정하기 위해 오름에 올라 활을 쏘았는데, 두 번째 시위를 당긴 양을라의 화살이 꽂힌 곳을 이도(二徒)라고 하였다.

이도는 1931년 4월 1일 제주읍 승격당시 제주읍 이도리로 칭하다가 해방 이후 1946년 8월1일에 제주도(濟州島)가 도(道)로 승격되자 북제주군 제주읍 이도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55년 9월 1일 제주읍이 시(市)로 승격되어 이도리가 이도동과 도남동으로 분할되었으며, 1962년 1월 1일 이도동이 이도1동과 이도2동으로 분리되었다.

이도1동은 가락천변(加樂川邊)에 있는 가령촌(嘉嶺村)을 중심으로, 중앙로타리에서 남문로타리를 경유하여 광양로타리에 이르기까지 제주시 구 상권의 중심지를 형성한다. 그러면서도 삼성혈, 제주성지 및 오현단이 있어서 역사와 문화의 중추를 형성하는 곳이기도 하다.

삼성혈, 고양부 삼성의 고향

삼성혈 안으로 들어가니 고목의 가지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하늘이 유난히도 푸른색이었다. 국내 관광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관광버스를 타고 오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 삼성혈 일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장태욱  


삼성(三聖)의 시조인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가 땅속에서 솟아 나왔다는 모흥혈 앞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삼성의 시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삼성전(三聖殿) 앞에서는 합장을 하는 일본인도 있다. 사람의 수보다 신의 수가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신과 친숙한 일본인들인지라 자신들의 조상과 혼인을 맺은 삼성의 제단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 제주성지 복원된 제주성지의 모습이다. 제주도 기념물 제 3호로 지정되었다. 검은 현무암이 파란 담쟁이와 대조를 이룬다.  ⓒ 장태욱

삼성혈에서 나와 북쪽으로 난 좁은 찻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가면 제주성지가 나온다. 과거 제주읍성의 일부가 복원된 것이다. 제주성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삼별초의 이문경 군대가 제주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제주성주에게 성문을 열어줄 것을 청했다는 내용이 이 성과 관련한 최초의 기록이다.

제주성지와 오현단에 남아있는 역사의 자취들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이 일어난 후인 1512년에 지방의 방어를 강화할 목적으로 목사 김석철(金錫哲)이 성을 확장하여 성의 둘레가 5486척(약 1662m)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증 일부인 85미터만 복원되었다.

제주성지는 제주도 기념물 제 3호로 지정되었다. 

▲ 오현단 제주성지와 접해 있다. 제주의 학문 발전에 기여한 5명의 현인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 장태욱

제주성을 배후로 그 북쪽에는 오현단(五賢壇)이 자리 잡고 있다. 오현이란 충암 김정,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규암 송인수, 우암 송시열 등을 말하며, 이들은 관인이나 유배인의 신분으로 제주와 인연을 맺어 제주의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자들로 인정을 받았던 자들이다.

충암 김정은 조광조가 주도하던 정치개혁에 참여하였다가 1591년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고, 청음 김상헌은 1601년 제주에서 ‘소덕유·길운절의 난’이 일어나자 어사로서 이를 수습하러 왔었다.

동계 정온은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역모자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시키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다 광해군의 미움을 사서 1614년 대정에 유배되었고, 우암 송시열의 종증조였던 규암 송인수는 1534년(중종29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송시열은 기사환국에 연류되어 1689년 8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제주로 유배되어 산지골에서 111일 동안 머물다 떠났다. 송시열은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오현단은 이들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제주도 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되었다. 

▲ 귤림서원 오현단 내부에 있다. 오현단이 장수당과 합해져서 귤림서원이 세워진 적도 있다.  ⓒ 장태욱 

한편 오현단 경내에는 향현사가 있는데, 이는 제주 향촌의 성현을 추앙하는 의미로 지어진 것이다. 향현사에는 한성 판윤을 지낸 고득종과 명도암 김진용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활력을 찾기 위한 노력들, 담벼락 갤러리와 보성시장 순대 

제주성지와 오현단의 주변을 걷노라면 주택의 담벼락에 제주의 자연과 민속을 소재로 그려진 다양한 벽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도1동주민자치위원회(위원장 홍국태)가 중심이 되어 ‘벽화로 보는 문화의 거리 남문골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추진한 사업의 결실이다(제주성지와 오현단이 위치한 부근을 남문골이라 한다).

▲ 제주성지 인근에 그려진 벽화 주변의 돌담과 어우러져 정감있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 장태욱

▲ 재활품을 이용한 벽화 벽화가 그려진 담벼락에 재활용품을 이용한 장식이 더해져서 다채로움이 더해졌다.  ⓒ 장태욱  

▲ 광양초등학교 인근의 벽화 바다를 배경으로 한 해녀 벽화가 시원함을 더해주었다.  ⓒ 장태욱 

▲ 보성시장 입구 이 일대 대표적인 재래시장이다.  ⓒ 장태욱  
 
 

이 사업은 역사 중심지로서 이도1동의 옛 명성을 되찾고 정감 넘치는 아름다운 동네로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제주성지 인근과 광양초등학교 부근에 28개소의 벽화가 그려졌다. 벽화가 현무암 담벼락이나 주변 나무들과 어우러져 도심에 생동감을 불어놓고 있다.
 
남문골에서 큰 도로변으로 나오면 제주칼호텔과 광양사거리 중간 지점에서 ‘보성시장’이란 간판이 걸린 재래시장을 볼 수 있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 보면 비어있는 상가들도 눈에 띄어, 이 시장도 다른 재래시장들과 비슷하게 침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장에 남다른 점이 있다면 순대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물건을 파는 가계들은 영업을 포기해서 문을 닫는데, 순대를 메뉴로 하는 식당들은 침체를 겪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순대를 먹으러 이곳을 일부러 찾는 관광객들도 있다.

▲ 보성 시장 내에서 순대를 파는 가계 보성시장의 순대는 만화가 허영만의 '식객'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 장태욱

이 시장에서 만들어 파는 제주 전통순대가 맛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순대가 허영만의 만화 ‘식객’이란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신형상권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는 재래시장이 살 길을 일부나마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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