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민의 제주 생활사] (2) 촐과 새

‘촐’(꼴)은 주로 소에게 먹이는 월동 사료 풀이고, ‘새’(띠)는 표준어로 띠에 해당하는 초가지붕을 덮는 풀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비곡’의 ‘비다’는 베다[刈]의 제주어다.

제주도 사람들은 ‘촐’과 ‘새’를 밭에서 마련하였다. 밭은 곡류, 채소, 풀을 심어 농사를 짓는 땅이다.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는 밭은 네 가지가 있다.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 농가에서 농사를 짓는 땅은 밭과 논 두 가지만 거느리고 있는 것과 달랐다. 제주도의 밭은 마소의 월동 사료인 촐을 가꾸거나 자라는 땅인 ‘촐왓’, 그리고 초가지붕을 덮는 풀인 ‘새’를 가꾸거나 자라는 땅을 ‘새왓’, 나락을 가꾸거나 자라는 땅인 논, 그리고 곡식을 가꾸거나 자라는 땅인 밭이다. ‘촐왓’과 ‘새왓’의 ‘왓’은 밭이라는 제주어이다.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원초 경제사회 때, 제주도에서 잘사는 집안에서는 밭 네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제주도는 논이 귀한 섬이었다. 전통적으로 제주도 전 경지면적 중에서 논은 0.5%에 지나지 않았다. 제주도 이외 육지부는 전 경지면적 중에서 논은 56%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제주도 이외 육지부의 농가에서는 논에서 생산되는 볏짚을 소의 월동 사료로 삼거나, 초가지붕을 이는 재료로 삼았다.

그러니 논이 귀한 제주도 사람들은 ‘촐왓’에서 소의 월동 사료인 ‘촐’을 마련하였고, ‘새왓’에서 초가지붕을 덮을 ‘새’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주도 농가에서는 논과 밭, 그리고 ‘촐왓’과 ‘새왓’을 거느리게 되었다.

촐왓 매매도증서(賣買渡證書).<br>1962년 1월 6일 매도인 정찬동(鄭贊錬) 씨가 매수인 김동규(金東奎) 씨에게 ‘촐왓’을 팔면서 써준 문서이다. / 사진=고광민
촐왓 매매도증서(賣買渡證書).
1962년 1월 6일 매도인 정찬동(鄭贊錬) 씨가 매수인 김동규(金東奎) 씨에게 ‘촐왓’을 팔면서 써준 문서이다. / 사진=고광민

‘촐왓’에서 가꾸는 ‘촐’과 ‘새왓’에서 가꾸는 ‘새’는 풀이다. 그런데 ‘촐’과 ‘새’를 거두어들이는 절기는 크게 달랐다. ‘촐’은 추분(9월 23일경)에, 그리고 ‘새’는 동짓달 초하룻날부터 거두어들였다. 동짓달 초하루는 절기로 대설(12월 7일경) 무렵이다. 추분은 24절기 중 열여섯 번째 절기, 대설은 24절기 중 스물한 번째 절기이다. 추분과 대설의 시간적 거리는 두 달 반이다. 왜 제주도 사람들은 추분에는 ‘촐’을 비고 대설에는 ‘새’를 비었을까. 그 까닭을 들여다보려는 것이 이 글 목적이다. 

추분에 ‘촐’ 빈다

추분은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기점이다. 그리고 바람이 바뀌고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식물의 성장도 멈추었다. 추분부터 제주도의 초목들은 영양분을 땅으로 내려보내기 시작하였다. 제주도 사람들은 바로 이때 ‘촐’을 거두어들였다. 곧 들이닥칠 겨울에 소가 먹을 ‘촐’을 비축하기 위하여 여념이 없었다. ‘촐’은 ‘자골’(차풀), ‘소새’(솔새), ‘새’(띠)로 구성되었다.

제주도 이외 육지부의 소 월동 사료는 볏짚을 잘게 썰고 콩깍지 따위와 함께 가마솥에서 삶아 만든 소죽이라면, 제주도의 소 월동 사료는 건초인 ‘촐’이었다. 암소 한 마리는 30바리, 그리고 수소 한 마리는 50바리의 ‘촐’을 먹어야 겨울을 넘길 수 있었다. 바리는 마소의 등에 잔뜩 실은 짐을 세는 단위이다. ‘촐왓’ 800평 정도에서 30바리의 ‘촐’이 생산되었다. 

안덕면 사계리 이원택(1933년생, 남) 씨는 ‘바굼지오름’(158m)에서도 ‘촐’을 생산하였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대정강사」(大靜講射).<br>1702년에 생산된 『탐라순력도』 속에서는 ‘바굼지오름’은 ‘파군산악’(破軍山岳)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도 ‘바굼지오름’에는 한 그루의 나무도 자라고 있지 않았던지, 왼쪽에 나무가 울창한 산방산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조선왕조 문신 정온(鄭蘊, 1569〜1641)은 『동계집』(桐溪集)에서, “‘바굼지오름’은 용의 모양인데, 누런 ‘새’가 가득하다”(破古爲龍 黃茅滿野)라고 하였다. 그때에도 ‘바굼지오름’에는 나무가 없었던 모양이다. / 사진=고광민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대정강사」(大靜講射).
1702년에 생산된 『탐라순력도』 속에서는 ‘바굼지오름’은 ‘파군산악’(破軍山岳)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도 ‘바굼지오름’에는 한 그루의 나무도 자라고 있지 않았던지, 왼쪽에 나무가 울창한 산방산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조선왕조 문신 정온(鄭蘊, 1569〜1641)은 『동계집』(桐溪集)에서, “‘바굼지오름’은 용의 모양인데, 누런 ‘새’가 가득하다”(破古爲龍 黃茅滿野)라고 하였다. 그때에도 ‘바굼지오름’에는 나무가 없었던 모양이다. / 사진=고광민

안덕면 사계리와 대정읍 인성리 사이에는 ‘바굼지오름’(158m)이 있다. 두 마을의 경계는 ‘바굼지오름’ 능선을 따라 동서(東西)로 나누어졌다. 사계리 사람들은 ‘바굼지오름’ 남쪽 일대를 ‘앞오름’이라고 하였다. ‘앞오름’에는 모두 7개의 ‘촐왓’이 있었다. 사계리 사람들은 ‘바굼지오름’에 있는 ‘촐왓’을 ‘촐케’라고 하였다. ‘촐케’는 여러 사람이 공동소유했다. ‘촐케’의 구획은 가늠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바굼지오름’ 꼭대기에서 어떠한 바위나 암벽으로 가늠 지점을 잡으며 구획하였다. ‘촐케’마다 이름이 있었다. 이 씨는 그것을 모두 기억할 수 없었지만, 이 씨가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섯케’라는 ‘촐케’에 대해서는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섯케’는 ‘앞오름’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촐케’였다. ‘섯케’는 6명 공동소유의 ‘촐케’였다. 나머지 여섯 개의 ‘촐케’도 계원의 수는 6명 안팎이었다. ‘촐케’ 7개는 하나의 공동조직을 갖추었다. 그 으뜸을 ‘집강’(執綱)이라고 하였다. 그 밑에는 ‘서수’(書手)가 있었다. ‘앞오름’에 있었던 ‘촐케’의 계원들은 해마다 정월에 회의를 열었다. 그때 임원도 선출하였다. 임원은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그리고 임원은 해마다 ‘앞오름’의 감시인을 선임(選任)하였다. 감시인을 ‘케지기’라고 하였다. ‘케지기’는 ‘촐케’를 지키는 이라는 말이다. 

‘케지기’는 ‘앞오름’ 7개의 ‘촐케’를 동시에 감시하였다.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날을 골라 슬쩍 ‘촐케’에 소를 풀어놓아 먹이는 이도 없지 않았다. 또 음력 6월 초순 여름 농사를 파종할 때 일소에게 주려고 ‘촐’을 몰래 베어가는 이도 없지 않았다. 또 보리 수확 때 보릿단을 묶을 풀을 베어가는 이도 없지 않았다. ‘케지기’는 이런 이를 집중적으로 단속하였다. 또 추분 때 ‘촐’을 수확하는 날이 정해지면 계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케지기’의 보수는 ‘촐’로 주고받았다. 그 수량은 ‘촐’ 10바리 안팎이었다. ‘케지기’는 소의 월동 사료를 마련할 ‘촐케’는 없지만, 기어코 소를 키워 가난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말겠다며 이를 악문 이들의 일거리이었다. 그런 이가 많았던지 ‘케지기’도 경쟁의 대상이었다. 

대설에 ‘새’ 빈다

대설은 이미 겨울에 들어선 시기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밭의 오곡을 거두어들이고 나서 대설 즈음에 ‘새왓’에서 초가지붕을 덮을 ‘새’를 거두어들이려고 여념이 없었다. 제주도에서는 대설 이전에 ‘새’를 거두고 등짐으로 지어 나르는 일을 금기로 여겼다. 대설 이전에 ‘새’를 베는 것은 생태적으로도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설 이전에 ‘새’를 베고 등짐으로 지고 다니는 것은 도둑놈의 짓이라고 여겼다. 제주도에서는 남의 ‘새왓’에서 도둑질하여 마련한 ‘새’를 ‘도둑새’라고 하니 말이다. 

안덕면 사계리 마을회관에는 「모초감호규약서」(茅草監護規約書)가 있다.

「모초감호규약서」(茅草監護規約書) / 사진=고광민
「모초감호규약서」(茅草監護規約書) / 사진=고광민
「모초감호규약서」(茅草監護規約書)<br>
「모초감호규약서」(茅草監護規約書)
「모초감호규약서」(茅草監護規約書)<br>
「모초감호규약서」(茅草監護規約書)
「모초감호규약서」(茅草監護規約書)<br>
「모초감호규약서」(茅草監護規約書)

‘모초’(茅草)는 ‘새’라는 말이다. 이 문서는 1921년 5월에 제주도 중면(中面) 사람들의 규약서(規約書)이다. 중면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서귀포시 안덕면의 옛 이름이다. 「모초감호규약서」 제1조는, 중면에서 ‘새왓’을 소유하고 있는 농부[田夫]를 대표하여 명망(名望)이 있는 사람으로 감독 한 사람과 부감독 한 사람을 전부총회(田夫總會)에서 선거로 선임하였다. 「모초감호규약서」 제4조는, ‘새’를 채취하는 기일(期日)은 감독이 정한 바에 따라 해마다 음력 11월 1일로 정하기로 하였다. ‘새’ 채취일이 확정되면 모초감독(茅草監督)은 각 마을에 통지하였다. ‘모초감독’은 ‘케지기’라는 말이다. ‘케지기’는 일정한 구역의 농경지에서 방목 등으로부터 지켜준 값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제주도에서는 ‘새허채’라는 말도 전승되었다. ‘새허채’는 ‘새’ 채취를 허가한다는 말이다. 자기 소유 ‘새왓’이라고 할지라도 정해진 날에만 ‘새’를 채취할 수 있었다. 「모초감호규약서」 제5조는, 정해진 날 이전에 ‘새’를 채취하거나, ‘새왓’[茅田]에 우마가 들어가 먹게 만든 자에게는 위약금 1원을 징수하였다. 「모초감호규약서」 제6조는, 밤에 ‘새왓’에 들어가 몰래 채취하거나 5조 규약을 위반한 자는 경찰주재소에 고발하여 징벌을 결정하였다. 제주도 사람들은 음력 11월 1일부터 ‘새’ 확보에 몰두하였다. 

구좌읍 상도리 정○○(1939년생, 남) 씨는 두 칸짜리 초가집에서 살았다. 정씨 집안에는 ‘새왓’이 없었으니, 해마다 남의 ‘새왓’에서 일을 거두어준 값으로 ‘새’를 마련하는 수가 많았다. 구좌읍 상도리에서는 ‘새’를 베어 묶은 뭇은 두 가지가 있었다. 비교적 크게 묶은 뭇을 ‘도리뭇’, 그리고 비교적 작게 묶은 뭇을 ‘좀단’이라고 일렀다. ‘도리뭇’은 8뭇, 그리고 ‘좀단’은 16뭇이 한 바리가 되었다. ‘새’ 수확을 거들어준 하루 품삯은 ‘좀단’으로 10뭇이었다. ‘좀단’으로 10뭇의 ‘새’는 성인 남자 한 사람의 등짐으로 질 수 있는 정도이다. 두 칸짜리 초가집 지붕을 이는 데는 ‘좀단’으로 ‘새’ 30뭇이 들었다. ‘새’ 30뭇은 남의 ‘새왓’에서 3일 동안 품을 팔아야 벌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산야에서 ‘각단’을 채취하여 ‘집줄’의 재료를 마련하였다. ‘각단’은 비교적 길이가 짧은 띠라는 말이다. ‘집줄’은 초가지붕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지붕을 동여매기 위해 짧은 띠를 이어 엮어 만든 줄이다. 두 칸짜리 초가집 지붕을 묶을 ‘집줄’인 경우, ‘진줄’은 20개, ‘조른줄’은 35개 들었다. ‘진줄’은 초가의 지붕을 가로로 동여매는 긴 줄이고, ‘조른줄’은 초가의 지붕을 세로로 동여매는 짧은 줄이다.

구좌읍 하도리 홍○○(1934년생, 남) 씨네 집에는 ‘새왓’이 없었다. 그러니 틈틈이 산야 ‘자왈’ 속에 숨어 있는 ‘새’를 ‘호미’로 베어낸 것을 모아두었다가 지붕을 이는 수가 많았다.

호미.<br>제주도 사람들은 곡식 따위를 베는 데 쓰는 도구를 ‘호미’라고 한다. / 그림=강봉석
호미.
제주도 사람들은 곡식 따위를 베는 데 쓰는 도구를 ‘호미’라고 한다. / 그림=강봉석

 

‘자왈’은 나무와 덩굴, 가시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서 우거진 곳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자왈’ 속에서 ‘새’를 마련하는 일을 “새 뽑는다”고 하였다. ‘자왈’ 속에서 ‘새’를 뽑으려면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하루에 죽을힘을 다하여 ‘새’를 뽑아도 한 짐을 채우지 못하였다.  

조천읍 선흘리는 비교적 한라산 쪽에 치우친 ‘웃드르’ 마을에 속한다. ‘웃드르’는 한라산 쪽에 치우친 들판이나 마을이라는 말이다. 이 마을 부봉룡(1939년생, 남) 씨 집안에서는 ‘양칙이동산’ 자락에 2천 평 정도의 ‘새왓’을 소유하고 있었다. ‘새’ 농사가 풍년이 들 때는 ‘각단’을 제외하고 삼 칸짜리 초가집 아홉 채 지붕을 일 정도의 ‘새’가 생산되었다. 이렇게 가꾼 ‘새’를 해마다 ‘알드르’ 마을 사람들에게 채취권을 팔았다. ‘알드르’는 해안가 아래쪽에 치우친 들판이나 마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새’가 익어갈 무렵인 음력 10월에는 ‘새왓’에 도둑이 드는 수도 있었다. ‘새도둑’들은 거의 ‘새왓’이 없는 알드르 마을 사람들인 수가 많았다. 부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새왓’의 도둑을 단속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새도둑’ 단속은 초저녁부터 밤 10시까지, 그리고 이른 새벽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새왓’ 단속은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왓’을 단속하였다. 도둑이 ‘새왓’을 단속하는 사람을 넘어뜨려 눕혀 헝겊으로 입을 막고, 그리고 ‘새’로 온몸을 꽁꽁 묶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승되기 때문이었다. 부 씨는 어린 시절에 ‘양칙이동산’에서 ‘새왓’을 단속하였다. 만약 도둑이 ‘새왓’에 들어오면, “그 밧디 새 직허염시메 들어가지 맙서!(그 밭에 ‘새’ 지키고 있으니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나직이 말하였다. 이런 말을 들은 ‘새도둑’은 그대로 달아나버리는 수도 있었지만, 기어코 ‘새’ 한 뭇이라고 호미로 베고 내빼는 억척스러운 ‘새도둑’도 없지 않았다. 

지혜와 간절함이 모여  

왜 제주도 사람들은 추분 때에 ‘촐’을 거두어들였을까. 추분 때는 모든 초목이 영양분을 뿌리로 되돌리기 시작하는 때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바로 이때 영양분이 듬뿍 들어 있는 ‘촐’을 베어 소의 월동 사료로 삼았다. 제주도 사람들의 소를 아끼는 따스한 마음들이 모여 추분에 ‘촐’을 베는 지혜를 터득하고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왜 제주도 사람들은 대설 때 ‘새’를 거두어들였을까. 영양분이 뿌리로 내려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새’가 초가지붕에 들어가면 부패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초가지붕 속으로 빗물이라도 들어가면 굼벵이들은 ‘새’ 속에 들어 있는 영양분을 먹으며 더욱 바글거렸을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초가지붕을 튼실하게 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모여 대설에 ‘새’를 베는 지혜를 터득하고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추분과 대설의 시간적 거리는 두 달 반이다.

새 비고 묶다.<br>2006년 12월 14일, 표선면 성읍리에서 촬영한 사진. 표선면 성읍리 1천 평의 ‘새왓’에서 약 30바리의 ‘새’가 생산되었다. ‘새’ 30뭇이 1바리이니, 1천 평 ‘새왓’에서 ‘새’ 900뭇이 생산되었던 셈이다. 아낙네들은 호미(낫)로 ‘새’를 베고, 남정네들은 베어낸 ‘새’를 묶었다. 한 사람이 하루에 90뭇의 ‘새’를 베었다. / 사진=고광민
새 비고 묶다.
2006년 12월 14일, 표선면 성읍리에서 촬영한 사진. 표선면 성읍리 1천 평의 ‘새왓’에서 약 30바리의 ‘새’가 생산되었다. ‘새’ 30뭇이 1바리이니, 1천 평 ‘새왓’에서 ‘새’ 900뭇이 생산되었던 셈이다. 아낙네들은 호미(낫)로 ‘새’를 베고, 남정네들은 베어낸 ‘새’를 묶었다. 한 사람이 하루에 90뭇의 ‘새’를 베었다. / 사진=고광민
‘고뎃흑’ 위에 어욱(억새)을 덮다.<br>1987년 중문관광단지에서 촬영한 사진. ‘고뎃흑’은 서리 위에 가로로 덮은 ‘서실목’ 위에 친 흙이라는 말이다. / 사진=고광민&nbsp;
‘고뎃흑’ 위에 어욱(억새)을 덮다.
1987년 중문관광단지에서 촬영한 사진. ‘고뎃흑’은 서리 위에 가로로 덮은 ‘서실목’ 위에 친 흙이라는 말이다. / 사진=고광민 
초가지붕에 ‘새’ 덮다.<br>2007년 2월 24일 제주민속촌에서 촬영한 사진. / 사진=고광민
초가지붕에 ‘새’ 덮다.
2007년 2월 24일 제주민속촌에서 촬영한 사진. / 사진=고광민
‘알’ 박다.<br>2007년 2월 24일 제주민속촌에서 촬영한 사진. ‘알’은 초가지붕이 축 늘어진 데 욱여넣는 ‘새’ 따위라는 말이다. ‘알’을 욱여넣는 일을 ‘박는다’고 한다. &nbsp;<br><br>사진=고광민<br>
‘알’ 박다.
2007년 2월 24일 제주민속촌에서 촬영한 사진. ‘알’은 초가지붕이 축 늘어진 데 욱여넣는 ‘새’ 따위라는 말이다. ‘알’을 욱여넣는 일을 ‘박는다’고 한다. / 사진=고광민

[고광민의 제주 생활사]는 제주의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이니스프리 모음재단’과 함께 합니다.


# 고광민

1952년 제주도 출생. 서민 생활사 연구자.

저서 ▲동의 생활사 ▲고개만당에서 하늘을 보다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 ▲제주 생활사 ▲섬사람들의 삶과 도구 ▲흑산군도 사람들의 삶과 도구 ▲조선시대 소금생산방식 ▲돌의 민속지 ▲제주도의 생산기술과 민속 ▲제주도 포구 연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 ▲한국의 바구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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