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74주년] 행불인 희생자 故 강중아씨 딸 강성자씨 “둘째 오빠가 남은 가족 목숨 살렸어”

가족 표석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제주4.3 유족.ⓒ제주의소리
가족 표석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제주4.3 유족.ⓒ제주의소리
표석을 닦고 있는 4.3 유족.ⓒ제주의소리
표석을 닦고 있는 4.3 유족.ⓒ제주의소리

제74주년 제주4.3 국가추념일인 3일, 4.3평화공원 곳곳에서는 질곡의 세월을 감내한 유족들의 통곡이 터져 나왔다. 

이날 4.3유족들 중 일부는 추념식 본행사 참여 인원이 299명으로 제한 됨에 따라 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 앞에서 가족의 이름을 찾고, 제를 올렸다. 

고령의 한 유족은 “아이고, 내가 정신이 이렇게 없나. (아버지 표석이) 어디 있더라”라고 혼잣말을 하며 표석들 사이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한참을 훑어보다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한 유족은 통곡하면서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어요. 용서해주세요. 아버지”라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또 다른 유족은 미리 준비한 과일 등을 표석에 올리고 절을 올렸다. 곳곳에서는 유족들이 정성스레 표석을 닦고는 표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고(故) 강중아씨의 막내 딸 강성자(76)씨는 4남매 중 홀로 아버지의 표석을 찾았다. 큰 오빠가 생사를 달리했고, 둘째, 셋째 오빠는 고령으로 제대로 걷지 못해서다. 

4.3유족 강성자씨가 아버지 고 강중아씨의 표석을 정성스레 닦고 있다. ⓒ제주의소리
4.3유족 강성자씨가 아버지 고 강중아씨의 표석을 정성스레 닦고 있다. ⓒ제주의소리

아버지는 4.3당시 중산간 마을이었던 제주읍 회천리에서 4남매를 키우다 1948년 12월21일 행방불명됐다. 

당시 강성자씨는 2살이었고, 둘째 오빠가 10살, 셋째 오빠가 6살이었다. 당시 10살이었던 둘째 오빠는 4.3 당시의 무서웠던 기억을 훗날 강성자씨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강성자씨는 “오빠한테 들어서 알게됐다. 4.3때 아버지가 군인들에게 끌려가서 행방불명됐고, 이후에 또 군인들이 집에 찾아와서 ‘가족’을 찾았다”고 말했다. 소위 또다른 빨갱이가 없는지 집안을 뒤지러 군인들이 다시 왔다는 이야기다. 

이때  강씨의 둘째 오빠가 기지를 발휘해 ‘가족’을  ‘가죽’으로 잘못 알아들은 시늉을 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강씨는 “영특했던 둘째 오빠가 밭에서 가죽신발을 주워 오면서 군인들에게 ‘가죽신발 여기 있어요’라고 말했다. 둘째 오빠가 못 알아 듣는 척해서 더 큰 피해가 없게된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강씨는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뒤 어머니는 각종 허드렛일을 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고 했다. 가장을 잃은 가족의 삶은 더 피폐할 수 밖에 없었다.  

강성자씨는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자 우리 가족은 회천을 떠나 신촌리에서 살았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엄마가 집 밖을 나섰고, 큰 오빠도 일찍 고인이 됐다. 내가 배고파서 울면 오빠들이 바다에서 보말(바다 고둥)을 잘게 으깨 나를 먹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가 오늘따라 더 그립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74주년 4.3희생자 추념일. 강씨의  아픈 기억 속 그날도 오늘처럼 바람이 뼛속으로 스며들었을까. 

아버지의 표석을 찾자마자 오열하는 제주4.3 유족. ⓒ제주의소리
아버지의 표석을 찾자마자 오열하는 제주4.3 유족. ⓒ제주의소리
가족 표석에 음식을 올리고 있는 4.3 유족 ⓒ제주의소리
가족 표석에 음식을 올리고 있는 4.3 유족 ⓒ제주의소리
4.3 유족들이 많은 표석들 사이에서 가족의 이름을 찾고 있다. ⓒ제주의소리
4.3 유족들이 많은 표석들 사이에서 가족의 이름을 찾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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