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 개교 70주년]⑤ 공공보건의료 태동과 제주도난개발 경종 울린 양 열사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과 6.25 한국전쟁의 참혹한 환경에서도 인재양성에 진심을 다한 도민 열망으로 탄생한 국립제주대학교가 2022년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고희(古稀)의 나이를 맞은 제주대의 역사는 교육사이든 지역사이든 사회적으로 조명하고 평가해야 할 유의미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제주의소리]는 진리와 정의, 창조라는 창학이념 아래 숱한 지식인과 인재들을 배출하며 제주 현대사의 한 축을 맡아 지역과 호흡해온 국립 제주대학교 70년 영욕의 역사를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엿한 종합대학으로 성장한 국립제주대학교는 진리와 정의, 창조라는 학교 이념 아래 도민사회와 함께 호흡해왔다.

제주대의 발전이 곧 제주지역의 발전이라는 말처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을 제주대가 함께 해온 것. 그 과정에서 섬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열약할 수밖에 없었던 의료 인프라 문제는 지역 유일 국공립 종합대학교인 제주대가 해결해야 할 하나의 숙제로 떠올랐다.

더군다나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상아탑 지식인들의 강한 요구와 무차별적 난개발을 반대하는 청년들의 외침도 학내를 가득 메웠다. 생활의 보금자리로써의 제주를 원한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도민사회에 울림을 전하고 있다.

1990년대의 제주대학교에선 제주공공의료 인프라 확충을 위한 대학병원 설립 운동과 故 양용찬 열사를 필두로 제주 난개발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의 투쟁사가 넘쳐났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98년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현판식. 당시 제주사회에는 상급 의료기관의 부재에 따른 의료 인프라 확충 요구가 이슈로 떠올랐다.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제주도 의료 인프라 확충과 ‘제주대학교병원’

1990년대 이전 제주도는 몇 안되는 종합병원에 의존해 도민 건강을 유지해왔으나 타 지역에 비해 상급 의료기관이 없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고 싶다는 도민들의 목마름은 여전했다.

이에 제주대는 물론 정치권과 의료계, 재계 등 도민들이 마음을 모아 정부를 설득하는 등 노력 끝에 1996년 새로운 학기의 시작에 맞춰 40명 정원 의예과를 신설하게 됐다.

곧이어 제주대는 의과대학 설립준비에 돌입했고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의과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의과대학발전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추진위에는 총장과 교무처장, 기획연구실장, 대학평의원회의장, 사무국장, 교수 등이 참여했으며, 지자체 협력을 위해 제주도 환경국장도 위촉됐다. 

추진위는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을 아라캠퍼스나 제주대 학교발전기금 소유의 서암농장 중 한 곳으로 선정키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서귀포시는 대학병원을 유치하기 위해 거린사슴 지구 시유지 10만 평을 기부채납 하겠다는 등 서귀포 유치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이처럼 도민사회의 다양한 노력을 바탕으로 제주지역 최초 대학병원 설립이라는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뜨겁게 달궈졌다. 그러나 정부는 그런 제주도에 그대로 찬물을 끼얹었다.  1996년 교육부가 ‘1997년 예산에 제주대 의대 병원건립 예산은 반영할 수 없다’고 통보한 것.

앞선 1994년 강원대 의대 인가 당시에도 재정경제원 장관과 교육부장관 간 국립대 의대병원 건립을 위한 국고보조 불가라는 문서적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제주대 의대 인가 당시에도 ‘제주대 총장으로부터 병원 문제는 제주대에서 자체 해결한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지역사회 큰 파문이 일기도 했다. 당시 정부 재정이 어려우니 대학병원을 지어달라는 말을 하지 말 것을 다짐하는 각서를 작성토록 한 것이다. 

2001년 11월 1일 제주시 삼도동 제주대학교 병원 개원 당시 모습.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2001년 11월 1일 제주시 삼도동 제주대학교 병원 개원 당시 모습.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제주시 삼도동 시절 제주대병원 전경. 사진=제주대학교병원 ⓒ제주의소리
제주시 삼도동 시절 제주대병원 전경. 사진=제주대학교병원 ⓒ제주의소리

초대 제주대병원 진료처장으로서 병원신축추진단장을 맡았던 김상림 제주대병원 전 원장은 최근 [제주의소리]와의 만남에서 당시를 떠올리며 전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제주의 설움이었다고 회상키도 했다. 

그는 “제주의 인구가 워낙 적으니 중앙 부처에 찾아가서 겪는 설움이 컸다. 국가 재정이 어려우니 ‘병원 지어달라는 말을 하지 말라, 도장을 찍어야 허락해주겠다’고 하니 어떻게 하겠나. 일단 인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대학병원 설립을 위해 노력해오던 제주대는 IMF 사태를 맞으며 악화된 국가 재정 상황 때문에 병원 신축이 아닌 제주의료원 인수로 방향을 선회했다.

1999년 8월 교육부장관은 제주의료원 인수 시 중앙정부 재정을 뒷받침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제주도 역시 교육부 승인과 국비 지원 확정 등 조건이 충족되면 매각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당시 제주대 동문들과 학생, 교수, 도민들은 제주의료원 인수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여 1만 4000여 명의 서명지를 도의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제주대병원은 2000년 10월 27일 제주의료원 매각 기본 협약이 체결되면서 본격 개원 준비가 시작됐으며, 2001년 11월 1일, 20개 진료과, 256병상 규모 제주대병원이 역사적인 출발을 알렸다. 

열악한 제주지역 의료 인재 배출과 의료 인프라 확충이라는 도민 숙원을 해갈할 수 있는 첫 출발이 이뤄진 셈이다. 제주 공공보건의료사의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자랑스런 제주대人: 4.3 진상규명과 제주도개발사 잊어선 안 될 故 양용찬 열사

1990년대 초 제주대에서는 4.3진상규명 투쟁과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1991년 4월 1일에는 4.3진상규명 투쟁과 관련해 사월대 발대식이 열렸고, 4.3당일에는 ‘4.3자주항쟁 계승과 노정권 퇴진을 위한 청년 아래 궐기대회’가 개최됐다. 

당시 1000여 명이 참가해 격렬한 시위가 펼쳐지는 과정에서 학생 50명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으며, 다음 날인 4일 진행된 집회에서는 800여 명이 참가해 200여 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그만큼 진리와 정의라는 상아탑 아래 공부하는 제주대 학생들은 4.3의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 속에 투쟁을 이었다. 이 같은 대학생들의 4.3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는 제주 사회의 4.3진상규명과 유가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진상규명 운동에 큰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 故 양용찬 열사의 생전 모습. ⓒ제주의소리
故 양용찬 열사의 생전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고 양용찬 열사 추모대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고 양용찬 열사 추모대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같은 해 6월에는 도민 주체 개발에 역행한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이 법을 막기 위한 투쟁이 시작됐다. 

‘특별법 저지를 위한 제주도민 걷기대회’가 열리기도 했고, ‘특별법 결사 저지와 노태우 방비 규탄을 위한 1만2천 청년학도 결의대회’도 개최됐다. 일부 학생들은 상경 투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같은 해 11월 7일에는 양용찬 열사가 반대를 울부짖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겼다.

양 열사는 1966년 9월 서귀포시 신례리에서 태어나 1985년 제주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가족 중 처음으로 4년제 국립대학교에 입학한 그였지만, 어려운 형편에 학업을 중도 포기한 채 농업과 청년회 활동에 참여해왔다.

군 제대 이후 복학하지 않고 타일공으로 일하던 그는 1989년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회원으로 농산물 수입개방문제와 제주도개발특별법 등 지역개발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다 1991년 11월 7일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 반대를 외치면서 분신, 20대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도민 절대다수가 반대하던 제주도개발특별법을 당시 거대 여당이었던 민자당이 밀어붙이자 “제주도개발특별법 반대, 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몸에 기름을 끼얹은 채 온 몸을 던졌다. 유서에는 삶의 터전으로의 제주, 생활의 보금자리로의 제주를 지키기 위한 그의 숭고한 뜻이 담겼다. 

양 열사의 분신으로 특별법 제정 반대 열기는 불타올랐으나 1991년 12월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면서 끝내 분신하면서까지 막아내고자 했던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 반대의 뜻은 좌절되고 말았다. 양 열사는 당시 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우리의 삶과 뼈를 갉아먹으며 노리개로 만드는 세계적 관광지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써, 생활의 보금자리로써의 제주도를 원하기에 특별법 저지, 2차종합개발계획 폐기를 외치며 또한 이를 추진하는 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이 길을 간다.”

개발 광풍에 맞서 제주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며 몸을 던진 양 열사와 그가 남긴 유서는 지금까지도 제주사회에 커다란 경종으로 남아 있다.  

총학생회는 이듬해 1992년 2월 28일 제주도개발특별법 날치기 통과에 따른 민자당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고 투쟁을 시작했다. 민자당에 대한 응징과 대통령선거에서의 민주정부 수립을 결의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이어 총학생회는 윤철수 총학생회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민자당 재집권저지민주정부수립을 위한 제주대학교 운동본부를 세우고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4.3민중항쟁 진상규명과 민주정부 수립 등을 건의하는 투쟁을 이었다.

1991년 '시민학도 단결해 4.3진상 밝혀내자'라는 대형 현수막과 걸개그림이 걸린 채 학생회관 앞에서 '4.3제주항쟁 계승 및 구국선열 추모제'를 열고 있는 모습.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1991년 '시민학도 단결해 4.3진상 밝혀내자'라는 대형 현수막과 걸개그림이 걸린 채 학생회관 앞에서 '4.3제주항쟁 계승 및 구국선열 추모제'를 열고 있는 모습. 사진=제주대학교. ⓒ제주의소리
故 양용찬 열사가 남긴 유서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故 양용찬 열사가 남긴 유서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대학교 53대, 54대 총학생회는 지난 2월 17일 오전 제주대 인문대학 1호관 진앙터에서 제주도개발특별법을 막기 위해 온 몸을 던진 故 양용찬 열사의 기림비 제막식을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대학교 53대, 54대 총학생회는 지난 2월 17일 오전 제주대 인문대학 1호관 진앙터에서 제주도개발특별법을 막기 위해 온 몸을 던진 故 양용찬 열사의 기림비 제막식을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6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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