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희생자 유해 5구 74년만에 신원 확인...“자식 도리 하게됐다” 유족들 뜨거운 눈물

유해 신원 확인 이뤄진 故김석삼씨의 딸 김영숙(75)씨가 74년만에 돌아온 아버지의 유해에 이름표를 붙이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유해 신원 확인 이뤄진 故김석삼씨의 딸 김영숙(75)씨가 74년만에 돌아온 아버지의 유해에 이름표를 붙이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딸의 출산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온 아버지는 사흘 만에 다시 가족들과 헤어졌습니다. 74년 지난 지금, 아버지와 다시 만납니다”

제주4‧3의 광풍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무참히 희생되고 땅속에 파묻힌 영령들이 74년 만에 가족의 품에서 영면에 들었다.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도는 10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제주4‧3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 보고회를 열었다.

현장에는 고인들의 유족과 구만섭 제주도지사 권한대행, 좌남수 제주도의회 의장, 이석문 제주도교육감, 고희범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오임종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영면에 든 희생자는 고군현(1926년생.안성리), 김영송(1918년생.함덕리), 김석삼(1914년생.호근동), 김규희(1924년생.화북리), 양희수(1923년생.동명리)씨 등 모두 5명이다.

신원이 확인된 4.3희생자 고군현(1926년생.안성리), 김영송(1918년생.함덕리), 김석삼(1914년생.호근동), 김규희(1924년생.화북리), 양희수(1923년생.동명리)씨의 유해가 위패봉안실로 이동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신원이 확인된 4.3희생자 고군현(1926년생.안성리), 김영송(1918년생.함덕리), 김석삼(1914년생.호근동), 김규희(1924년생.화북리), 양희수(1923년생.동명리)씨의 유해가 위패봉안실로 이동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신원이 확인된 4.3희생자 고군현(1926년생.안성리), 김영송(1918년생.함덕리), 김석삼(1914년생.호근동), 김규희(1924년생.화북리), 양희수(1923년생.동명리)씨의 유해.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신원이 확인된 4.3희생자 고군현(1926년생.안성리), 김영송(1918년생.함덕리), 김석삼(1914년생.호근동), 김규희(1924년생.화북리), 양희수(1923년생.동명리)씨의 유해.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이중 김석삼씨는 1948년 불법적인 군법회의, 김규희씨와 양희수씨는 1949년 군법회의를 통해 희생됐다. 고군현, 김영송씨는 4‧3 당시 희생돼 70년 넘게 행방불명인으로 남아 있었다.

고인들은 정뜨르비행장의 땅 속에 갇혀 통한의 세월을 지나다 2007년부터 2009년 사이 제주국제공항 남북활주로 서북쪽과 동북쪽에서 진행된 발굴을 통해 비소로 어둠 속을 벗어났다.

발굴 이후 10년 가까이 유족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학교 법의학연구실에서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법(NGS3)을 적용해 기존 유해에 대한 신원 확인에 성공했다.

고인 중 김규희씨는 지난해 101세의 누나 김공열씨가 채혈을 하면서 극적으로 신원 확인이 이뤄졌다. 4남매 중 막내였던 고인은 1949년 불법적인 군법회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누나 김공열씨는 이날 현장을 찾아 동생의 유골에 이름표를 붙여주려 했지만 코로나19와 궂은 날씨 탓에 함께하지 못했다. 대신 조카 김덕용씨가 작은아버지에 대한 예를 다했다.

유해 발굴로 신원이 확인된 故 김규희씨의 조카 김덕용씨가 작은아버지의 유해에 이름표를 붙이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유해 발굴로 신원이 확인된 故 김규희씨의 조카 김덕용씨가 작은아버지의 유해에 이름표를 붙이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10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 보고회에서 유족들이 유해 앞에서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10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 보고회에서 유족들이 유해 앞에서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고인 김석삼씨의 곁은 딸 김영숙(75)씨가 지켰다. 고인은 4‧3이 몰아치기 직전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이후 아내의 출산 소식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딸을 품에 안았다.

행복도 잠시였다. 귀국 직후 군경이 마을로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고인은 핏덩이였던 딸과 함께한지 사흘 만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수형인명부에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목포형무소로 이송된 후 1949년 출소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제주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딸 김영숙씨는 “아버지는 내 출산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일 이라는 짧은 만남으로 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74년간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울먹였다.

김씨는 “지난 세월 아버지는 막연한 존재였다.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며 “설마하는 마음에 유전자 검사 채혈에 참여했고 뜻밖에 소식을 듣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74년이라는 긴 시간 아버지는 다시 가족들과 함께 하게 됐다”며 “뒤늦게나마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자녀의 도리를 할 수 있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10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 보고회에서 유족들이 유해 앞에서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10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 보고회에서 유족들이 유해 앞에서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10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 보고회에서 한 유족이 유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10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 보고회에서 한 유족이 유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양희수씨는 1949년 사형 선고를 받았고 김영송씨는 그해 9월 경찰서에 끌려간 후 행방불명됐다. 고군현씨도 비슷한 시기 토벌대에 연행돼 가족들고 연락이 끊겼다.

제주도는 2007~2008년 제주공항 서북측 발굴과정에서 128구를 유해를 확인했다. 이어 2009년 공항 동북측에서 추가 유해발굴 사업을 진행해 259구를 추가로 수습했다.

공항에서 수습된 유해 387구 중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131구다. 이번 5구를 더하면 136구가 된다. 2006년 화북 유해 1구와 2007년 별도봉 유해 1구까지 포함하면 총 138구다.

4·3 당시 행방불명자로 결정된 희생자는 지금까지 3631명이다. 2006년부터 2021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뤄진 곳은 화북동, 제주공항, 도두동, 선흘리, 태흥리, 북촌리, 구억리 등이다.

2006년 화북동 11구, 2007~2008년 공항서북측 128구, 2009년 공항동북측 259구, 선흘리 1구, 2011년 태흥리 1구, 2018년 공항·도두·선흘·북촌·구억리 5구, 2021년 6구 등 모두 411구다.

이중 138구만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나머지 273구는 아직까지 유족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를 추가 신원 확인을 위해 유가족 채혈을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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