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삶이 힘들때 부모님 묘소를 찾는다

 
 
▲ 아버지의 자전거를 추억하며, 남이섬에서 담아 온 사진 입니다.
ⓒ 김강임
 
남들은 이맘때 빨간 카네이션을 사서 부모님을 찾아간다고 부산을 떤다. 하지만 나는 꽃을 달아드릴 부모님이 안 계시다. 꽃집 앞에 선보인 카네이션을 볼 때마다 그저 씁쓸한 마음뿐이다.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줄 시댁 부모님도, 친정 부모님도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버렸으니까 말이다.

'계절의 여왕' 5월, 나는 5월이 되면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추억 속을 달린다. 그 여행지는 부모님의 무덤이다. 그리고 자전거를 탔던 고소함에 취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어버이를 떠올리는 시간은 삶이 힘들고 지칠 때였다.

 
▲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의 등 뒤에서 느꼈던 고소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김강임
 

아버지 어깨 위에서 나는 여행을 떠났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와 헤어진 지 40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내가 7살 때 내 곁은 떠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지금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께서 퇴근길 앞마당에서 태워주셨던 자전거였다.

아버지께서는 퇴근 후 집에 오시면 꼭 대문 앞에서 "끼익∼" 하면서 브레이크 밟는 소리를 내셨다. 그것은 셋째딸인 내게 '아빠가 왔으니 빨리 나와라!' 하는 신호였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 퇴근시간이 되면 아버지를 기다렸던 나.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등'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의 등에 기대어 느꼈던 고소함은 사랑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어쩌다 술을 드시고 와서 자전거를 태워주시지 못하는 날이 있다. 그 날은 나와 아버지의 진하고 고소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아버지는 자전거 대신 어깨에 목말을 태우고 마당을 한 바퀴 돌아다니셨다. 그리고 기분이 좋으신 날엔 온 동네를 한 바퀴 돌아다니시기도 하셨다. 그때 내가 아버지 어깨 위에서 바라보았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나의 여행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이 힘들고 지쳐 술을 드셨을 아버지. 피로가 겹쳐도 어김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았을 아버지. 셋째 딸을 어깨에 앉히고 너울너울 춤을 추셨을 아버지. 나는 그 때 너무 어려서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 한번 제대로 말해 드리지 못했었다.

 
▲ 고향집 언덕에 묻힌 부모님의 묘소, 삶이 힘들땐 혼자서 뚜벅뚜벅 찾아갑니다.
ⓒ 김강임
 

그 때 배운 사랑으로 아이들을 사랑한다

철이 들고 이렇게 머나먼 객지에 나와 세상을 살다 보니, 아버지의 사랑은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사랑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베풀었던 깊고 넓은 사랑을 비록 모방할 순 없어도, 그 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었으리라.

나는 어쩌다 출장을 가거나 고향집 근처에 가는 날이면 꼭 시간을 내서 어버이 무덤에 오른다. 어린 시절 높기만 했던 고향마을 언덕은 이제 밋밋하게만 느껴진다. 뚜벅뚜벅 오르는 고향 마을 길에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이 쏟아진다.

아버지의 등 뒤에서 들었던 개 짖는 소리, 아버지의 어깨에서 보았던 들녘의 풍경들, 그리고 아버지의 숨소리. 아버지와 함께 뛰놀았던 뒷동산은 늘 내 놀이터이자 아지트였다.

고향마을 뒷동산은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했다. 그리고 고향마을 어귀 냇가에는 수양버들나무가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마을 집들은 이제 온 데 간 데 없고, 그 자리에는 비닐하우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2월이었다. 고향집 근처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무덤에 오르기 위해 꽃다발을 한 묶음 샀다. 그리고 5월이면 아버지 가슴에 달아줘야 할 꽃다발을 부모님의 무덤 앞 꽃병에 꽂아드렸다. 바람이 차가웠다.

가슴 속에는 늘 응어리져 남아있는 이름, 자주 부르지 못하는 이름, 무덤가에 와서나 불러보는 이름 ,아버지! 나는 "아버지! 셋째 딸 왔습니다!"라며 엎드려 인사만 드릴 뿐이었다.

 
▲ 무덤앞에서 술을 따르진 않습니다. 5월에 달아드리지 못한 꽃다발을 무덤가에 뿌리고 올 뿐 입니다.
ⓒ 김강임
 


직접 달아드리지 못하는 꽃, 무덤에라도

아버지의 무덤에 오르면 어린 시절 상여 뒤에 따르며 통곡을 했던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머님도 아버지 곁에 누워 있으니 이제는 통곡할 사람도 없다.

살아생전 술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나는 한 번도 아버지 무덤에 술을 따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머님께서는 살아생전에 늘 "그 원수 같은 술, 네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셨어, 술 때문에 돌아가셨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어머님의 말씀을 귀가 아프게 들어왔다.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아버지 무덤에 술을 따르지 않았다.

다만 5월에 남들처럼 빨간 카네이션을 부모님 가슴에 달아드리지 못함이 너무 애석하다. 때문에 꽃다발을 한 아름 가슴에 안고 부모님의 무덤을 오를 뿐이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