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58) 마누라 잃은 건 안 섭섭하여도 담배통 잃은 건 섭섭하다
* 일른 : 잃은, 일르다→잃다
* 남통머리 : 담배통
골초의 생리를 익살맞게 표현했다. 한시도 담배 없이는 못 산다는 골초일지언정 아무려면 마누라에 비할까.
실제로 마누라와 담배통을 놓고 그 소중함을 따질 때, 아무리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마누라보다 담배통을 중히 여긴다면, 그야 과장된 우스갯소리일 수밖에 없다.
담배를 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잠자리에 들 적에도 머리맡에 담배통을 놓아야 마음이 놓인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니다 보니, 살을 맞대고 사는 마누라 못지않은 애착을 갖게 된다 함이다.
담배는 쉽게 끊기 어렵다. 맞는 말이다. 2,30대 젊은 시절엔 하루 담배 두 갑을 피웠다. 그때 ‘거북선’이란 담배가 나올 때, 두 갑을 셔츠 주머니에 넣고 출근하면 학생들이 ‘거북이 두 마리 잡고 다닌다.’라 했던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끊지 못한 게 담배였다. 파란 병에 하얀 위장약 ‘암포젤 M' 그 유명한 위장약을 달고 살면서도 그랬다. 의사의 지시도 아내의 눈총도 먹혀들지 않았다.
담배 양을 줄인다고 하루 다섯 개비를 넣고 출근한다 했다가 들통 난 적도 있었다. 어느 일요일, 일직하면서 그때 초‧중등생이던 두 아들을 데리고 학교에 갔다가 책상 서랍에 넣고 피우던 담뱃갑을 들킨 것. 가족이 담배 끊게 한다고 대동단결(?)하던 판에 무사했겠는가. 가장 체면이 남루가 다 됐었다.
끝내 위병이 악화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위 수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후에도 끊지 못해 피우다 끊다를 반복하다 끊노라 한 게, 담배 생각나면 입에 목캔디를 넣고 바삭바삭 씹다 보니 어금니가 성하질 못하다. 담배를 끊은 지 30년을 됐을 테다. 한데 임플란트 하느라 목하 돈께나 투자하는 중이다.
담배, 하면 시인 오상순(吳相淳, 1920년 <폐허> 동인)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허무의 탐구와 그 초극의 의지’를 노래한 그의 호가 ‘공초(空超)’다.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 지인들이 붙여 준 별명이다. ‘골초’를 ‘공초’로 미화한 건가.
공초 오상순 시인은 역대급 기인(奇人)이었다.
일본 도시샤대학 종교학과를 졸업, 당시로선 가방끈이 길었음에도 어떤 자리도 맡지 않고 여러 사찰을 전전하거나 다방에 앉아 담배나 피우며 문학에 정진했으니 기인이라 할 수밖에.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은 평생 무소유로 살아 시집 한 권 내지 않았다.
어느 날 소설가 이봉구가 다방에 앉아 있는 공초를 보니, 웬일인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멀근히 있지 않은가.
“아니, 선생님, 왜 담배를 안 피우시죠? 끊으셨습니까?”
“끊기는, 차라리 목숨을 끊지.”
“돈이 떨어지셨군요.”
“돈이란 게 늘 떨어지는 것이지.”
이봉구는, 얼른 나가 담배 한 보루를 사다 선생님에게 건넸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 살붙이 하나 없던 공초는 죽을 때도 조계사 허름한 뒷간 방에서 숨을 거뒀다. 유해는 수유리 북한산 등산길 옆에 안장됐는데, 묘 앞 시비에는 그의 〈방랑의 마음〉 첫머리가 새겨져 있다. 원래 자유와 방랑은 동의어다
‘흐름 뒤에 / 보금자리 친 / 오, 흐름 위에 / 보름가리 친 / 나의 혼(魂)’
도안과 글씨체가 독특해 자체로 예술작품이라고 한다.
묘역에 자연석으로 된 ‘재떨이’가 있어 돌아가셔도 계속 후대의 사람들이 담배를 공물(?)로 바치도록 만들어 놓았다.
마누라 잃은 건 섭섭하지 않아도 담배통 잃은 건 섭섭해 할 정도로 담배는 일단 중독되면 죽자 사자 피우게 된다. 무서운 게 담배 중독이다. 오죽 했으면 담배 끊은 사람하고는 상종 말라 했을까. 그러나 필생의 각오로 끊어야 하는 게 담배다. 금연은 안된다. 단연(斷煙)이라야 한다. 담배를 끊겠다면 맨 처음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 앞에서 선언해야 하다.
“나, 오늘부터 담배를 끊겠노라!”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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