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서귀포 월평에서 태어난 윤상순 어르신은 80년 넘는 월평마을의 변천사를 오롯이 그의 몸 안에 간직하고 계신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가집에 살던 세대가 아닌 나는 다시 한번 어르신께 초가짓는 날 이야기를 여쭈었다.지금이야 행정구역이 동으로 바뀌어 서귀포시 중문동이지만 어르신이 집을 지을 당시에는 중문면이었다. 중문면에 ‘정시’가 있었다고 한다. 정시는 제주에서 지관(地官), 즉 풍수를 보는 사람을 의미한다. 어르신은 우선 정시의 역할을 해주셨던 법환에 계신 한 스님에게 날을 받아오셨다. 이 당시에는 음력 6월에
“들을 것도 없고, 골을 것도 없쪄.”서귀포시 월평마을에 사시는 윤상순 어르신(1938년생)을 처음 만나뵙기로 한 날, 어르신의 현관문 앞에서 들은 이야기다.“나는 뭐 특별한 인생을 산 것도 아니고이, 나보다 말 잘하는 사람들도 많은디 무사 나한테 와서? 난 들을 것도 없고 골을 것도 없쪄.”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는 듯, 아무 표정없는 얼굴의 어르신 뒤로 정갈해도 너무 정갈한 부엌이 보였다. “우와 어르신, 이거 차롱 아니에요? 아니 어떻게 차롱을 이렇게 깨끗하게 보관하셨어요? 차롱이 너무 예뻐요.”하나하나 먼지가 묻지 않게 정
홍경자(73) 어르신이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한 것은 전화교환수로 일을 시작하기 전의 일이었다.어르신은 상군이었던 분을 새어머니로 맞이하면서 바다와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홍경자 어르신 가족들도 해녀 가족으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새어머니를 따라다니다 자연스럽게 애기해녀가 된 어르신이 16살이 되던 해, 첫 출가물질을 다녀오기로 결심한다.몇 가지 생필품만 보따리에 싸서 아리랑호에 몸을 실었다. 부산항에 도착해 차를 타고 경주시 감포로 갔다. 출가물질을 떠날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무 옷이 없었을 터라 물소중이와 물적삼만 입고 낯선 바다
2020년이었다. 같이 공부하시는 선생님께서 제주시 한림읍 한수리 영등굿을 다녀오셨다며 보여준 사진 두 장에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진경 씨, 여기 해녀 회장님이 오메기술을 잘 만드신대. 오메기술 직접 빚어서 영등굿에 이렇게 올리시더라고.”선생님이 사진과 함께 들려주신 이야기는 이렇다. 2020년은 윤사월이 낀 해라서 각 월을 의미하는 열두 단지에 한 개가 더 보태져 열세 개의 단지에 오메기술을 담아 바쳤다고 한다. 이렇게 술 항아리를 바치면 심방이 열어보며 한 해를 점친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언젠가 이 오메기
“그렇게 친정에서부터 나와 함께 했던 소농장을 마흔 즈음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그땐 뭐 그리 나쁘지 않게 좀 되었어. 아, 이제 좀 살림이 펴지려나 하고 있을 때 즈음 1997년도에 IMF가 터진거야. 살 때 350만원에서 400만원 정도 주고 산 소들이 세상에, IMF가 터지니까 똥값이 된거야. 소 한 마리에 100만원도 못 받았어. 진짜 고생하면서 키운 소들인데, 그때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팠고 많이 울었어.”김순백 어르신이 본격적으로 소농장을 운영하려고 했을 때 불운처럼 IMF가 다가왔다고 한다. 침통하고 속상한 마음이 너무
“아빠, 저 고등학교 못 다니게 되면 여군 입대 하겠습니다.”낭랑 18세의 꿈 많은 소녀,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이 똑 떨어지고 굴러가는 돌에도 까르르 웃을 줄 아는 그런 나이, 소녀 김순백은 아버지에게 여군에 입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내비쳤다.당연히 돌아오는 것은 호된 꾸지람. 낭패였다.“아버지 친구분들께서 집에 오셨을때 일부러 분위기는 이때다 싶어 이야기를 꺼냈는데 정말 호되게 혼이 났지.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은행원이 여자들에게 최고의 직업이었어요. 그땐 컴퓨터가 있었어 뭐가 있었어. 주판 위 보이지 않는
역사의 산 증인으로 해병대에 복무 하셨던 이성지 어르신은 26살에 전역을 하시고 제주로 돌아왔다. 어르신이 해병대를 지원하시게 된 동기는 당시 처절했던 제주의 상황(제주 4.3) 때문이었다. 어르신은 이렇게 살다 죽으나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으나 어차피 죽는다면, 나라를 위해 용맹히 싸우다 죽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어르신에게 그 시절 그 시대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우울함, 슬픔은 오히려 고된 훈련을 이겨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르신은 훈련기간을 거치며 나를 있게 해 준 나라를 위한 애국심, 훗날 우리 자손들의 터전인 대한민
2018년 11월, 한림에 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이었다. 도내에서는 내비게이션에 의존하지 않고 운전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터라, 돌아올 때는 오로지 감으로 낯선 길을 운전하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4시와 5시 사이였을까. 서쪽 수평선 가까이에서 비추는 햇볕이 벽에 반사돼 자그마한 동네집들이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어느 한적한 시골동네 좁은 2차선 길을 천천히 운전하고 있는데 내차 앞으로 참새 대여섯 마리가 문이 열린 돌창고 안으로 쌩하고 들어갔다.참새를 쫓던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참새가 들어간 돌창고 안으로 향했고 뉘엿뉘엿 지고
처음에 어르신이 오합주를 만드는 데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설명해 주셨지만, 나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 일반적으로 제주에서 오합주를 만들 때 들어가는 재료는 “오메기청주, 꿀, 계란, 참기름, 생강”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어르신의 오합주 만드는 방법을 듣고서야 김순화 어르신의 오합주가 이해가 되었다.“오합주에는 계란 또시(그리고, 또를 의미하는 접사)... 청 또시.... 참기름 또시... 찹쌀 또시..... 누룩. 여기에 끓인 물이 있어야 해. 끓이지 않으면 안되어.”참고로 옛 어른들은 꿀을
“아니, 어르신 이게 뭐에요? 수꿩 아니에요?”어르신을 만나기로 한 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날은 대한(大寒)보다 춥다는 소한(小寒)이었다. 롤케이크와 쑥찐빵을 손에 들고 들어간 제주시 삼양2동 어느 가정집 마당에서는 평소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오늘이 사냥 가능한 날이라서 우리 아들도 다녀왔는데 비가 와서 꿩들이 날아다니지 않고 다 숨었어. 그래서 오늘은 한 마리 밖에 못 잡았다더라고.”마당을 들어서자마자 내가 본 광경은 잡아온 꿩을 삶아 털을 뽑는 장면이었다.“이 꿩 손질해서 뭐 만드시려고요?”“뭘
신희자 어르신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전편에서 이야기했듯 어르신이 태어난 곳은 한림읍 대림리이다. 아버지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에는 몇 년 동안 심한 가뭄이 들었단다.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던 어르신 가족들도 가뭄의 여파는 피해가진 못했다. 보리쌀, 조, 산듸쌀을 힘차게 갈아대던 방앗공장은 기계가 멈추고 적막함이 감돌았다. 방아기계가 돌아가야 그 삯으로 돈이나 쌀보리를 받는데 그 시기에는 그런 삯을 기대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대림에서는 당장 먹을 것이 없기에 깅이, 보말, 전복 등 바릇 괴기라도 먹기 위해 바닷가인 한림으로
드르륵.“안녕하세요. 어르신 저 왔어요.”한림의 한 한복집. 문을 연 순간,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한 폭의 액자였다. 마치 카메라로 담은 듯 그린 한 장의 그림은 생동감이 넘실거려 내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나는 단번에 그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차조!고개를 돌려 한복집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한복집인지 갤러리인지 모를 정도로 형형색색의 다양한 그림과 글이 걸려있었다. 그렇다. 내가 찾아온 곳은 70세 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12년차 예술가 신희자 어르신의 작업장이었다. 그림 수준이 너무 훌륭
“이디 왕 사 갑서(여기 와서 사세요).”오사카의 쓰루하시 시장에서 낮익은 소리가 들린다.30대 후반의 홍우중은 제주가 아닌 오사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르신은 15살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17세에 제주시 광양으로 자리를 옮겨 여관 등에서 일을 하거나, 남의 밭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에 직업군인의 길을 택해 21살에 해병대에 입대 하셨다. 처음으로 제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어르신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
80대 중반의 할아버지는 눈빛이 또렷하셨고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으며 꼿꼿하게 편 상체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2021년 가을에 만난 86세 할아버지, 홍우중 어르신은 내가 그동안 상상했던 남자 어르신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푸근하고 상냥할 것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상상하고 만나뵈었지만 어르신은 반듯하고 정갈한 아우라를 풍기며 맞이해 주셨다. 그래서 어르신을 처음 뵌 날, 나는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처음에는 어르신의 ‘포스’에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어
안일수 어르신의 삶의 터전은 제주시내이다.하지만 어르신의 마음의 터전은 고향인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이다. 이는 어르신의 공간, 즉 어르신이 꿩메밀칼국수를 파는 식당에 걸린 액자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안개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듯한 메밀꽃밭의 사진과 벚꽃과 유채가 만개한 봄날의 가시리 사진액자는 제주시내에 있어도 마치 따뜻한 봄과 시원한 가을, 가시리로 여행을 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어렸을 적 어르신이 살던 집은 우리가 사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제주 옛집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한다. 대나무 울타리와 동백나무가 둘러싸고
“아이고 고생햄쪄, 시장 막 홍보하젠 하난.”이 말과 함께 냉장고에서 꺼낸 검정 봉지가 내 손에 들려졌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건네고 두 손을 내밀어 넙죽 받은 봉지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빨리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시장에서 종종거리던 걸음은 시장을 나와 이내 뜀박질로 변했다. 지난번 어르신에게 한 번 호되게 욕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던 나는 무심한 듯 툭, 건넨 어르신의 그 검정봉지가 너무 반갑기도 했고 그 봉지 속 정체가 너무 궁금하기도 했다.메밀범벅!!!봉지 속 정체는 바로 큼지막한 고구마가 콕콕
서귀포시 월평마을 서옥춘 어르신의 제주음식이야기 ②1936년에 태어나신 서옥춘 어르신은 혼인 하고 슬하에 4남 2녀를 두셨는데 혼인 후에도 계속 직장생활을 하셨다. 말하자면, 그 당시에 보기 드문 ‘워킹맘’이셨다. 서옥춘 어르신은 근무하시던 학교의 교장 선생님 중매로 혼인을 하셔서 월평마을에서 거주하기 시작하셨는데, 임신한 뒤 출산을 앞둔 상황에서도 매일 서귀포시 월평에서 도순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하셨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 당시 대부분의 직장여성이 결혼을 하면 일을 그만두는 것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사셨던 것이다.어르신은 첫
서귀포시 월평마을 서옥춘 어르신의 제주음식이야기 ①“네? 돗통시가 네 개나 있었다고요?”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돗통시는, 그러니까 제주 전통 가옥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이자 제주토종돼지를 기르는 곳은 한 집 당 하나였다. 성읍민속마을이나 나의 외가인 가파도에서도 한 집에 돗통시가 두 개 이상인 집을 보지 못했다. 제주 문화를 공부하기 위해 읽었던 책이나 기록에서도 한 집에 돗통시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의 머릿속에는 ‘민가 하나 당 한 개의 돗통시’가 공식처럼 각인되어 있었나보다.그런데 202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김태자 어르신의 오메기술 이야기 (2)사실을 고백하자면, 김태자 어르신의 오메기술은 특별한 술이 아니다.어르신이 늘 강조하시는 것처럼, 오메기술은 어르신 댁에서만 만드는 특별한 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르신 나잇대의 여자분들이라면 다 만들 수 있고, 집집마다 누구나 빚어서 마셨던 술이기 때문에 유독 어르신 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단다. 다만 아이들을 낳고 키우느라 정신없었던 한 2년 정도를 제외하고 스물세 살부터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 2021년 현재까지 술을 빚어온 일이 본인 인생에서 가장 잘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김태자 어르신의 오메기술 이야기 (1)2019년 4월 12일, 둘째 아이를 낳고 딱 3개월 되는 날이었다.그날 나는, 아직 갓난아기였던 둘째를 차에 태우고 차를 몰아 5·16도로를 따라 제주시에서 서귀포시로 넘어갔다. 서귀포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했던 ‘제주여성의 삶을 통해 본 제주전통식 문화 이야기’ 교육을 듣기 위해서였다. 노산에 둘째를 낳고 몸조리를 좀 더 했으면 하는 어른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나는 백일도 채 안 된 아기를 이동식 요람에 눕혀 교육장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걱정과 감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