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5월 15일 미국은 1945년 이래 27년간 점령해 온 오키나와의 시정권을 일본에 반환했다. 이날은 일본 측에서 보면 패전으로 잃은 섬들을 전쟁의 승자로부터 평화롭게 되돌려 자국으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한 반가운 기념일인 셈이다. 2022년 5월 15일,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현은 공동으로 「오키나와 복귀 50주년 기념식」을 오키나와와 도쿄에서 동시 개최했는데, 기시다 수상은 오키나와 기념식장에 참석했다.그러나 식장 정면 앞 교차로에서는 기시다 총리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이 집결해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키나와현경찰 외에 규
2022년은 오키나와 반환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이후 동아시아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체제에 포섭되었다. 제주 4·3항쟁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시간은 오키나와라는 지역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패권국가 미국의 등장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전면에 내세운 대결의 시작이었다. 제주 4·3의 대규모 학살도 따지고 보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1972년 오키나와 반환에 이르기까지 일본, 미국, 오키나와, 그
대만 × 우크라이나 예술가국제교류전 @VT 아트살롱"익숙한 슈퍼마켓이 폭격으로 파편처럼 변해 하루아침에 노숙자가 된 사람들, 해외여행을 간다고 믿는 아이들을 우리는 보았다.... 전 세계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 율리아 코스텔리에바(우크라이나 큐레이터)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우크라이나어: російсько-українська війна 러시아어: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ая война)은 2014년 2월 20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발발한 전쟁이다. 당초에는 저강도 대리전쟁이었다. 2022년 2월
4.3미술제가 올해로 29회차를 맞았다. 예술공간이아와 산지천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 《제29회 4.3미술제: 봉인된 풍경》에는 제주도와 한반도 수도권과 광주, 여수의 작가들을 비롯해 하와이, 홍콩, 오키나와, 타이완 등의 국외 작가들까지 총 57인(팀)이 참여했다. 광주 5.18과 여수와 순천의 여순 10.19 등 이번 전시의 주제인 저항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도시의 작가들이 함께 한 것은 근 몇 년동안 정립한 항쟁 연대의 지속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북서 태평양의 섬들에서도 항쟁의 역사를 공유하는 예술가들이 함께하여 제주4.3
2022년 3월 2일 수도 키예프의 TV탑에 로켓이 명중해 인근 보행자 5명이 숨지고 일부 방송을 할 수 없게 됐다.2022년 2월 24일 새벽,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정식으로 발발했다. 이미 양측의 상황이 긴박했다고 하지만 본격적인 전쟁을 치른 것은 국제사회가 깜짝 놀랄 일이었다. 이 글 집필 시점에서 전쟁은 약 한 달간 계속되고 있으며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고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개전 후 러시아를 포함한 곳곳에서 휴전 요청과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반전 시
우크라이나 시내와 사람들이 러시아의 공격을 받고 파괴되는 모습을 각종 언론에서 목격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많은 오키나와인에 있어서, 그 광경은 1945년에 오키나와의 섬들이 일·미의 전쟁터가 된 지옥화를 상기시키는 것인 것 같다. 나는 오키나와전 체험자는 아니지만 미군이 전투 상황을 기록한 사진과 동영상을 봐왔고 무엇보다 수많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거나 읽어왔다. 땅을 기어가는 전차, 폭발의 섬광과 불꽃, 폐허와 잔해 더미가 된 시가지, 안전한 땅을 찾아 줄지어 선 피난민들, 노상에 나뒹구는 시체들,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가만히 집
ㅡ 개발이라는 또 다른 폭력에 주목하자1. 오키나와 부흥과 보이지 않는 목소리최근 오키나와 미군 점령기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서가 나왔다. 오키나와 전투와 전후사 전공자인 자하미 나오미(謝花直美)의《전후 오키나와와 부흥의 또 다른 소리-미군 점령하 부흥을 요구한 사람들의 생존과 희망(戰後沖繩と復興の異音)》이다. 자신의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한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오키나와 역사에서 소외되어왔던 오키나와 여성의 삶을 ‘부흥’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발 혹은 부흥의 역사에서 그동안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
2월 23일 홍콩의 우이차오 감독 작품 《시대혁명》이 비가오는 가운데 타이페이에서 프리미어 상영되면서 일주일치 좌석이 매진됐다. 상영 후에는 박수가 그치지 않았고, 관객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지난해 《시대혁명》이 제58회 금마상(Golden Horse Awards)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았을 때, 관객들은 기립박수로 이 작품을 찬양했다. 키위 차우 감독은 수상 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대만에 감사드립니다. 금마상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영화 마지막에 있는 크레딧에 홍콩인이라고 넣었어요. 이 작품이 양심과 정의감을 갖고 홍콩을 위해
한국 가수 싸이의 을 패러디하여 신나게 말춤을 추는 행위예술가 아이웨이웨이. 그는 말고삐를 잡은 손모양을 수갑을 차고 묶인 손으로 바꿔서 중국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자신의 상황을 전세계 유튜버들에게 알렸다. 아이웨이웨이는 동시대 최전선의 전위예술가이다. 예술가에게까지도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며 엄격하게 관리하는 중국 정부로서는 자금성에 대해 손가락 욕을 날리며, 지진 후 대책이 미비한 쓰촨성 학교 사태를 비판하는 예술가의 활동을 용납할 수 없었는지 지속적으로 탄압해왔다. 수개월간 감금 당하고 막대한 벌금을 매기기도 했다.
1950년대 중국 공산당이 집권하고 국민당이 대만으로 철수하자 친중 좌파와 친국민당 우파 세력은 각각 홍콩이라는 예외 지역에 일정한 정치력을 갖고 노동조합, 교육기관, 문화 신문 매체 등에서 두 갈래 계파가 병존 대립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한편 1949년 이후 대량 난민이 홍콩에 유입되면서 전후 50만명 수준이던 인구가 50년대 초 220만명 가까이 증가하면서 취업난, 주거 및 생활물자 부족 등 민생문제와 치안악화와 경찰부패 문제가 심각해졌고, 사회적 불만은 언제든 식민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바뀔 수 있는 시한폭탄처럼 변해갔다.
1970년 12월 20일 새벽 오키나와 섬 중부에 위치한 코자(현 오키나와시) 번화가에서 미군이 오키나와인을 친 교통사고를 계기로 대규모 화공사건이 발생했다. 미군 유흥지구로 자리잡은 코자의 중심가는 크리스마스 시즌 주말이라 지역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미 25년 된 미국의 점령 통치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누가 선동하지도 않았는데, 우발적으로 미군 차량에 불이 나면서 80여대가 연이어 불길에 휩싸였다. 미군 관계자의 차량 노란 번호판은 표적 식별을 용이하게 했다. 평소 미군이 떨어트리는 달러로 사는 장사치들도 가세했다.미
1. 부드러운 평등과 곧은 분노대나무는 평등하다. 각자의 높이로 자라면서도 땅 속 줄기로 얽혀 숲을 이룬다. 평등한 삼투압의 힘으로 대나무는 서로의 어깨를 부빈다. 대나무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힘껏 모아 바람을 만든다. 바람이 대숲을 흔드는 것이 아니다. 대숲이 바람을 만든다. 스스스, 사사사, 흔들리면서도 지치지 않는 소리들 앞에서 못난 놈도 잘난 놈도 없다. 대나무는 대나무로 살고 대나무로 죽는다. 대꽃이 피면 대숲 하나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각자의 힘으로 하늘을 향해 나아가되 모두의 힘이 다하면 함께의 시간으로 죽는다.플라스
지난주 금요일에 열린 타이베이문화상 시상식을 보면서 8월 말 우리 곁을 떠난 은사 샤오리훙을 떠올렸다. 늦은 문화상을 시장이 수여하고 내 친구인 루샹녕과 샤오 선생의 부군이 단상에서 받는 것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심사위원을 대표해 전장지 간슈즈 사장이 연설해 샤오 선생의 삶을 말하면서 번번이 목이 메었다.그는 남편을 따라 홍콩에서 대만으로 건너와 이 땅에 헌신하며 뿌리를 내렸다. 오래된 양계장을 죽위공작실의 공방으로 개조하고 대만의 민속예술촌을 처음 시도하여 문화정책이나 환경·생태예술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만과 아시아에
지난 번까지 말했듯이 홍콩은 전후 중국, 영국, 미국 3극 구도에서 결국 영국에 점령되었다. 그 역사를 따라 홍콩의 발전을 더듬어 보자.1949년 4월 하순 인민해방군(PLA)은 양자강을 건너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다. 이대로 진전되면 인민해방군은 수개월 안에 광둥(廣東)에 도달해 홍콩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영국 홍콩 정부는 영국이 홍콩을 유지한다는 성명을 내고 시민들에게 홍콩에 머물도록 독려함과 동시에 상세한 작전계획을 수립해 미군에 홍콩 방위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인민해방군 선발대가 홍콩에서 다리를 건너 선
요나구니 섬은 일본 영토의 최서단에 위치한다. 도쿄에서 직선거리가 2000km가 넘지만 대만 일란현 쑤아오 진까지는 약 111km, 맑은 날에는 수평선 위로 우뚝 선 대만의 섬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면적 30㎢에 못 미치는 외딴 섬이지만 끝없이 펼쳐진 해상의 길은 대만과의 오랜 역사를 이 섬에 안겨주었다. 제주와 요나구니 섬의 인연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은 1477년 2월 요나구니 섬에 표착한 제주도 주민 3명이 이 섬에서 오랫동안 보호받고 당시 류큐왕국의 슈후 슈리를 거쳐 조선에 보내졌다는 호의적인 일화다.이
국가라는 환상2018년 세상을 떠난 문충성 시인의 시 중에 ‘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라는 시가 있다. “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우리는 때로 우리를 습격했습니까/제주 섬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산폭도가 되고 빨갱이가 되고/산간 마을들 불탔습니까 그 섬마을 사람들/총에 맞고 죽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습니까 비록/ 그 비참한 삶이 지난 세기 1940~50년대뿐이겠습니까”‘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 중‘우리가 우리를 토벌했습니까/우리가 우리를 습격했습니까’라고 묻는 시인의 말은 단순히 4.3의 비극을 말하기 위한
지리산은 한반도 남단에서 가장 높고 깊은 산이다. 또한 지리산은 지리적인 높이와 깊이의 수치 이상으로 장대한 역사적 서사를 품고 있으며, 특히 현대사의 깊은 상처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지리산둘레길’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자산이 있다. 그것은 지리산 주변을 굽이굽이 휘감고 도는 약 300km에 거리의 걷는 길이다. ‘지리산둘레길’은 걷기라는 신체적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을 공동체와 마주하며, 자연을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마침내 우주와 생명의 뜻을 새기고자 하는 수행의 장이다. 이러한 ‘지리산둘레길’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자세를 바로잡아 몸 뒤에 둔 조개껍데기에 살짝 손을 얹고 있다. 그의 온화하면서도 힘찬 얼굴에 빛이 쏟아지며 향상되는 정신이 활짝 피어 있다. 그것은 당시 약진하는 대만 사회에 대한 작가의 기대와 상상을 구현해 대만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일본에서 미술을 배운 최초의 인물황투수이(黃土星, 1895-1930)는 일제 강점 첫 해 타이베이시 멩지아 주쉬의 뒷골목(현재의 완화)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만 미술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했고, 조국 사람들을 위해 섬의 아름다움에 걸맞
앞서 말했듯이 홍콩의 사회적 모순은 역사화 시각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변화를 살펴보자.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전과 항복을 선언하고 대동아공영권이 붕괴되면서 곳곳에서 정치세력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중국은 전승국의 하나로 일본으로부터 대만과 만주를 되찾았고, 구미 열강의 지배하에 있던 조계지 일부도 이 시기에 정식으로 반환됐다. 그러나 한반도처럼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소련과 미국이 개입해 수립한 두 독립된 정권이 전쟁을 거쳐 현재까지 분단 상태가 지속되는 것과 같이 우여곡절을 겪
1929년 교토제국대학의 카나세키 타케오는 오키나와 각지에서 류큐인의 유골을 수집해 교토로 가져왔다. 이들 중에는 오키나와 섬 북부에 있는 나키진 촌의 무무자카 바카 무덤에 묻혀 있던 유골도 포함된다. 절벽 중턱의 동굴을 이용해 만든 이 묘소는 16세기 이전에 이 지역에서 활약한 유력 인사와 그 일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 행위는 무덤 파헤치기라고 할 수 있지만, 대학의 권위를 배경으로 학술연구에 이바지한다는 명목이 있었기 때문에 자료의 수집으로서 정당화되었다. 오키나와 현 당국이나 경찰은 카나세키의 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