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코드 인사’는 ‘낙하산 인사’와 거의 동일시된다. 사전적으로 봐도 그렇다. 능력이나 자질, 도덕성 혹은 전문성과 ‘무관’-없다는 말이 아니다-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둘 다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이 비슷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다. 무슨 결사체를 조직하는 것도 아니고, 거창하게 들릴 수 있다. 까놓고 말해 제 입맛에 맞는 사람을 쓴다는 의미다. 먼저 사견임을 밝혀둔다. 정치적 이념 또는 성향을 따지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국정을 뒷받침할 주요 인사들의 코드가 다른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1980년대 민주화운동 현장이나 노동운동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귀에 익었을 노랫말이다.우리는 오랫동안 노동자는 일하는 사람들이며 신성한 노동에서 행복과 삶을 누리고 있다고 믿어왔다. 노동을 신성시해오던 사상은 고대 중국 문헌이나 성경에도 찾을 수 있고 마르크스도 노동은 인간을 이루는 본질이라고 했다. 노동이 곧 생산이며 생존을 결정하던 시대에 일하지 않는 자는 사회구성원으로부터 지탄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느덧 노동이 주는 행복과 신성함은 어디 가고 노동자에게는 노동할 의무만 남아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2000년 11월24일, 제주경찰청 앞에서 경찰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 전까지 경찰의 시위 과잉 진압 등을 비판하는 집회는 간간이 있었으나, 오로지 경찰을 타깃으로 면전에서 핏대를 세우는 것은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수백명이 모인 집회 명칭은 ‘제주경찰사(史) 4.3역사 왜곡 규탄 도민대회’. 그해 10월 제주경찰청이 [제주경찰사] 개정판을 내면서 약 10년 전 초판의 4.3 왜곡 내용을 그대로 실은 게 발단이었다. 4.3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제주4.3특별법이 같은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가 1690년에 쓴 ‘통치론’이란 책이 있다. 사회계약론을 이론화한 책으로 유명하지만, 필자가 관심 갖는 부분은 ‘제2권 제5장 소유권에 관하여’이다.로크는 신이 세계를 공유(共有)물로 주셨기에, 애초에 세계는 만인의 공유물이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더해 공유물인 자연에 인간이 노동을 투여하면 사유(私有)할 수 있다는 ‘노동가치설’을 주장했다. 로크가 ‘노동가치설’을 주장한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사유재산권에 2가지 전제조건을 달았다는 점이다. 로크에 따르면, 사유물 이외에 다
본란에서 이미 두 차례 (내가 송악산에 ‘이끌려가는’ 이유)(다시 송악산을 생각한다)에 걸쳐 송악산 뉴오션타운 개발사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사업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동의안이 제주특별자치도의회에 상정을 앞두고 있어서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입장을 피력한다.송악산 주변은 제주섬 자연과 역사가 살아있는 박물관이고, 전시관으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야 할 곳이다. 지질학적 측면에서 볼 때 송악산은 초기의 수성 화산활동과 후기의 마그마성 화산활동을 차례로 거친
‘무(無)노조’ 하면 국내 최대 재벌 삼성이 떠오른다. 거꾸로가 더 맞을 것 같다. 삼성 하면 '무노조 경영'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초일류 기업이라는 이미지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그만큼 삼성에게 노조는 절대 허용해선 안될 존재였다.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요즘으로 치면, 노조는 일종의 바이러스 취급을 받았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사시(社是)와 다름없는 삼성의 무노조 방침은 ‘선친의 유훈’이란 이름 아래 오랜기간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구축했다. 노조 설립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르면 누를수록 더 튀어오르는 게 세
4.15총선에서 압승한 더불어민주당의 첫 반응은 “무섭다”였다. 개헌만 빼고 사실상 모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게 됐지만, 민주당으로선 ‘4년 후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유권자들이 부여한 ‘코로나19 극복과 경제회복’이라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면 장차 호된 회초리를 맞을 수 있다는 경계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모처럼의 압승은 17대 총선 이후의 기억을 소환한다. 딱 16년 전이다. 2004년에도 선거는 4월15일 실시됐다. 그해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엄청난 역풍을 몰고왔다. 선거 결과 열린우리당
색의 부조화드디어 21대 총선이 막을 내렸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뜨거운 투표율에 대한 여야 간 해석이 서로 엇갈리는 가운데, 봉인된 투표함의 뚜껑이 열리자 이번에도 유니폼과 안색(顔色)의 역전극이 펼쳐졌다. 개표가 진행될수록 여당이 경합지역을 하나둘씩 승리지역으로 접수할 때마다 환해지는 여당 인사들의 핑크빛 홍안(紅顔)은 개표 상황실을 가득 메운 파란색 유니폼의 물결 속으로 더욱 세차게 번져나갔다. 반면에 국회에서 뛰쳐나와 광화문 거리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태극기부대와 동고동락하며 지난 4년을 주로 장외투쟁에 투자한
역대 선거 중 ‘깜깜이 선거’가 아닌 적이 있었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아마도 매번 정책과 공약, 자질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꼬집은 말이리라.이런 점에서 보면 4·15총선은 어느 때보다 깜깜한 선거로 기록될 공산이 크다. 코로나19 사태가 총선 정국을 덮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팬데믹 상황에서 누구를 탓할 계제는 아니다. 유권자 입장에서 후보 검증의 기회가 줄어든 게 아쉬울 따름이다.팬데믹은 선거 풍경도 바꿔놓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중요시되면서 후보들은 인파가 몰리는 대규모 유세를 자제했다. 주먹 인사가 악수를 대신
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가 혼란과 공포를 겪고 있는 가운데 21대 국회의원 선거일이 다가왔다.우리나라 국회는 국민이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로 뽑은 국회의원으로 구성한다. 국회의원에 대한 과도한 권한을 제한하자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국회가 갖는 힘은 크다. 국회는 입법권을 가지며 정부 예산안을 심의확정한다. 국정을 감시하고 조사하고 대통령을 탄핵소추를 의결할 수도 있다. 국회의원에게는 국회 내 직무상 발언에 대해 면책특권도 있다.정권을 쥐락펴락할 만큼 권한이 크기에 국회는 늘 정치투쟁이 벌어진다. 유권자들은 대의정치가 갖는 한계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문재인 대통령의 호소는 절제됐지만 절절했다. 제72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서다. 호소는 정치권을 향한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의 조속 처리 요청이었다. 4.3생존수형인과 4.3행불수형인에 대한 재심을 서둘러달라는 당부의 의미도 있었다. 고령의 당사자들에게는 촌급을 다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재임 중 두차례 추념식을 찾은 것에서도 절박함이 느껴졌다. 코로나19 때문에 참석자가 크게 줄어 식장은 한산했지만 문 대통령의 메시지는 묵직했다. 문 대통령이 일일이 이름을 언급했듯이,
‘코로나19 청정 제주’가 ‘1일천하’로 끝난 이후 4명의 확진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해외 입국자들이 문제였다. 국경을 무색케하는 팬데믹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말그대로 세계적 대유행이다. 대한민국만 잘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유럽, 미국도 아직 초반전일지 모른다. 강물에 휩쓸리듯 뇌관은 6대륙으로 흩어졌다. 마찬가지다. 제주만 잘 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문을 완전히 걸어 잠글 수는 없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간 어떻게 지켜왔는데…. ‘강남 모녀’에 대한 도민의 분노는 수긍이 간다. 억대 손해배상 청구는 성난 민심
2017~18년 필자는 미국에 머문 적이 있다. 끝없이 뻗은 길을 달리며 미국 땅이 얼마나 크고 풍부한지 체험했다. 미국의 부유함이 느껴졌다. 몇몇 국립공원 탐방은 너무 좋았다. 자연의 웅장함과 장엄함에 감탄했다. 미국 국립공원은 부러움 그 자체였다. 그래도 어느 사회든 좋은 것만 있진 않다. 가끔씩 언론을 도배하는 총기 사고 소식에서 미국 사회의 이면을 알 수 있었다. 의료 시스템 문제도 그 중의 하나였다. 미국 샌디에고 대학 병원은 호텔처럼 깨끗하고 좋았다. 사람들은 잘 차려 입었고 병원은 한결 여유가 있었다. 가까운 지인이 있
한국의 코로나19 대처에 대한 세계의 찬사는 투명성에 기인한다. 방대한 진단검사 규모와 속도, 체계적인 방역 시스템도 근본적으로는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됐기에 가능했다. 투명성은 대중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원동력이었다. 당국은 대중에게 투명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했고, 대중은 그러한 당국에 신뢰를 보냈다. 만약 여기에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을지 모를 일이다. 이르긴 하나, 한국이 빚은 ‘전염병 통제의 세계적인 모델’은 결국 민·관의 합작품이다. 반대로 불투명은 갖가지 오해와 억측을 낳는다. 신뢰가 싹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인 코로나19가 예전의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그동안 걷잡을 수 없듯이 늘어나던 코로나19 확진자 증가세가 점차 둔화되어 지금은 일일 확진자 수가 완치자 수를 밑돌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콜센터, 병원, 요양시설, 종교시설 등에서 집단 감염이 지속되고 있고, 유럽과 중동이 새로운 진원지가 되면서 역유입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아직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정부는 대구와 경북 일부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였
꽃의 생김새가 나비와 닮다는 호접란(胡蝶蘭)은, 일부 제주도민에겐 화사함 보다는 참담함을 안겨준 존재로 기억된다. 처참한 성적표를 내고 접은 호접란 수출 사업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160억원이 넘는 혈세가 증발했다. 우근민 도정 때였다. 시작은 담대했다. 도내 화훼농가들의 소득을 높여주겠다는 명분은 당시만 해도 그럴 듯 했다. 뾰족한 활로가 없던 상황이었다. 2000년, 16개 농가가 참여하는 수출단지가 제주에 조성됐다. 이어 2003년까지 주요 수출처인 미국의 LA 외곽에 4만2776㎡의 농장을 사들였다. 제주 모종
그림의 떡‘찻잔 안의 태풍’으로 그칠 것으로 기대했던 신종 코로나 19가 이제 전 세계로 일파만파 확산일로를 달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증가세가 주춤하고 있지만, 서구를 비롯한 세계 전체는 강력한 태풍 앞에 운명을 맡긴 채 가련하게 떨고 있는 촛불의 처지에 몰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태 초기 정부의 발 빠른 사전대책으로 며칠 동안 불과 30명 이내로 묶었음에도 감염자가 7000명을 훌쩍 넘는데다 사망자가 50명을 상회한다. 31번 확진자를 기점으로 뚜렷한 원인도 없이 일상적으로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는 이른바 ‘지역사회 감염’이 대
제 몸을 해부용으로 내놓은 ‘드라마 속 유의태’-현실에서는 유의태와 허준이 동시대 인물이 아니라는 둥 논란이 분분하다-는 당대(?) 영웅임이 틀림없다. 백성의 목숨을 구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하다가 본인도 감염돼 숨진 중국의사 리원양도 영웅으로 불릴만 하다. 리원양은 신종 코로나의 존재를 외부에 처음 알린 인물이다. 이 일로 당국에 의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영웅은 난세에 나는가 보다. 아니 그보다는 세상이 어지럽고 앞날이 깜깜할수록 위기 극복 능력을 갖춘 사람이 두각을 나타낸
‘이달에 굶주리고 앓아 죽은 사람이 팔도에서 1만3420여명이다.’ 조선 현종 12년(1671) 6월 기록이다. 경신대기근(1670~1671)이라 불리는 이때는 소빙하기를 맞아 여름에도 우박이 내리고 가뭄과 홍수가 잇따라 발생해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여기에다 전염병이 끊이지 않아 조선인구 10%가량이 사망했다.이때만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온통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어나간 백성들 통곡소리로 가득 차다. 우리 제주도민들은 섬이란 환경에 갇혀 더욱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인류는 오랜 세월 전염병에 시달리며 살아왔다.원인도 모른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코로나 19는 이미 육지부에선 지역사회 전파 수순에 접어들었다. 확진자와 접촉자, 그 동선만 피하면 되는 단계를 벗어났다는 얘기다. 마치 좀비라도 만난 듯 이제는 괜히 서로를 멀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들이 오히려 섬뜩함을 자아내는 영화 인베이젼을 떠올려보라. 보균자가 누군지 모른다는 점은 공포를 유발한다. 그럼에도 보균자와의 접촉을 완벽히 차단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다. 물론 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