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아침에 눈을 뜨면, 1월 1일의 내가 생각난다. 2007년의 첫날. 그리고 본격적인 인도여행의 시작. 돈과 여권이 든 힙쌕을 품에 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샌 그 차갑던 새벽이. 누가 인도를 더운 나라라 했던가. 물론 남인도쪽으로 내려가서는 그 말에 뼈저리게 긍정했지만 아직 나는 북인도에 있었다. 북인도의 겨울은 상당히 춥다. 동절기가 짧기 때문에 난방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저는 아직도 잘 모르지만 초등학교 입학식 날, 딸아이가 보였던 모습을 이해하기란 정말 힘들었습니다.딸아이의 새 출발을 위해 ‘만사를 제쳐두고’ 입학식에 참석했던 저는 애초의 설렘과 기쁨 그리고 노파심은 안중에도 없고 시종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나중엔 슬슬 부아가 돋기도 했습니다
3월의 시작이다. 영락없는 봄날이다. 한낮에는 조금만 꼼지락거려도 땀이 날 지경이다. 거실에 책장을 만들고 구들방에 연기가 새어나오는 틈을 메우며 하루를 보냈다. 내일은 된장 담을 항아리를 준비해야한다. 봄이 다가올수록 점점 부산스러워지는 건 시골에 사는 이 땅의 모든 농사꾼들의 일상이다.
제주의 소리 측에서 창간 3주년을 맞아 ‘제주의 소리에 바란다’는 요청을 해왔을 때 “어,저저...”라는 말이 부지불식간에 나왔다. 생일을 맞아 덕담 몇 줄 적는 것이야 무에 망설일 일일까마는, 일순간 말더듬이가 됐던 것은 당혹감 때문이다. 나 역시 제주의 소리에 고정적으로 원고와 글을 올리는, 어쩌면 제주의 소리
제주 애월읍 납읍리. 어머니의 고향마을이다. 소녀시절 어머니가 걸어다녔을 골목길과 거리를 더듬었다. 마을은 조용했다. 19년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하는 어른들은 보이지 않았다. 외가댁에 놀러가 동네를 쏘다닐 때 반겨주던 마을사람들. 그들도 없다. 살아계시다면 다 어디로 간 걸까? 어머니의 고향마을도 내 고향 어음리처럼 늙어가고 있었다. 그 옛날 어른들은
미자야.승환이 승진이 모두 청년이 되어서 군대에도 가도 그러는구나...그 애들하고 너희들이 뉴욕에서 함께 지내던 때가, 한 15~6년 됐나 봐, 엊그제 같은데...나는 그때 40대 초반(?)...걔들이 나더러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니까 참으로 쑥스러웠는데...'젊은 할아버지'였지. [너의 외할머니와 나의 아버지는 13살이나 차이가 났다. 나의 아
2006년은 내게 굉장히 힘든 한 해였다. 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포함한 수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그 변화의 대부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울지 않고 지나간 날이 손에 꼽힐 만큼 힘든 한해였다. 어리다고 해서 힘겨움까지 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열일곱에 대해 막연한 환상과 기대를 품고 있던 열여섯의 내겐, 너무도 가혹했던 열일곱. 그 열일곱의 마지
문답식 협력학습에 매료되다티벳의 세라 사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티벳은 불교국가로서 교육은 대개 사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사원은 정해진 시간에 학승들의 수업장면을 공개하는 까닭에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가려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도 시간에 맞춰 수업을 보러 갔다. 사원에 도착해보니 붉은 승려복을 입은 젊은 학승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고 그
스티븐 호킹 박사가 새로운 책을 냈다고 한다. 그는 다른 물리학자보다 훨씬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박사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가 '루게릭'이라는 병마와 투쟁을 하고 있다는 점 역시도 스포트라이트를 한층 밝게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기사를 읽었다. 예전엔 두 손가락을 움직여서 느리게나마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던 그가, 병이 악화됨에 따라 이젠 눈동
말로는 참 쉬운데 사실 실제 생활에서는 가장 힘든 게 두가지 있다. '사랑'과 '용서'.오죽했으면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을까.용서는 사랑보다도 몇 배나 더 힘든 것이구나.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한 것같이 남을 용서하라"고 한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초중
한국 도깨비를 돌에 새긴 석공예 명장 우리 도깨비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오랜 세월 그림책이나 교과서에서 보아온 도깨비의 모습이 맞을까. 머리에 뿔이나 혹이 나고 원시인 옷차림으로 쇠방망이를 들고 있는 모습? 죄송하지만 이 녀석 역시 우리 도깨비가 아니다. 우리 도깨비엔 뿔이나 혹이 달린 경우가 없다. 쇠방망이를 들고 다니지도 않는다. 얄미운 이 녀석은
안녕하십니까, 귤 툰을 ‘제작하고’있는 송현우입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연초에 했던 말‘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를 다시 또 하려니약간 ‘머쓱’하긴 합니다만, 이 즈음을 진짜 연초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다름아닌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로마나의 열여덟살 일기] 연재하며... 김 로마나(18)양은 고교 1학년 때인 지난해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다. 그날로 교복을 벗고 집과 인근의 도서관을 오가며 즐겁게 공부중이다. 사업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홈스쿨링(home scooling)을 하면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부 과목에 대해서만 학원수업으로 보충할 뿐 스스로 학습일정을 짜고 공 부하고 있다. 물
일요일인 어제 늦은 아침을 먹고 각시와 저는 시장에 갈 채비를 했습니다. 설에 쓸 제수용품 중에서 미리 구입해도 되는 생선과 건어물을 구입할 요량으로요. 곤한 낮잠에 빠진 딸 지운이는 어머니에게 부탁을 하고 나오는데 원재도 따라나섭니다. 사실 온 가족이 다 외출 겸 가고 싶었지만 지운이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어머니에게는 못내 미안했습니다.내가 대형마트 대신
국민학교(요즘은 초등학교)를 언제 졸업할꼬 손꼽아 기다리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그리고 졸업식을 하면서 왜 그렇게도 슬피 울었던고...마치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처럼...[왜 당시 선생님들은 모두 훈육주임 같았었는지, 엄청 많이 얻어 맞은 기억밖에 별로 좋은 추억들이 없거든. 국민학교 2학년때 나의 집 앞에 삼촌벌 되는 애가 1학년으로 막 입학했다. 그
간밤에 눈이 내렸다. 올겨울 들어 가장 많이 쌓인 눈이다.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은지라 혼자 남아 흙집에서 잠을 청했는데 눈이 이리 많이 오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구들방은 여전히 뜨근하다. 밖에서 눈보라가 몰아쳐도 알 수가 없다. 휘적휘적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눈더미를 헤치고 장작을 꺼내 구들 아궁이에 몇 개 던져놓았
5년 전, 나는 삼십 대에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배낭여행을 떠났었다. 언어도 서툴고 지도 보는 법도 익히지 못했으면서, 오로지 '해야 할 일'을 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감행한 자아실현 프로그램이었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를 찍고 돌아오는 여정이었는데, 숙소만 예약하고 도착지에서 가이드북을 들고 물어물어 다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114번지. 바다위에 치솟은 봉우리 하나가 구멍 뚫린 겨울바다에 온몸을 적셨다. 파도는 '바다 속에서 수증 폭발한 화산체'를 세차게 때린다. 용암 분출로 이글거렸을 성산포 바다는 파도가 흔들어도 말이 없다. 바다위에 솟아 난 봉우리 때문이다. ▲ 일출봉 등성이에서 바라본 성산포 ⓒ 김강임 제주
어느새 1월도 세월의 저편으로 사위어져갑니다.그동안 망년회다 신년회다 해서 술독에 빠져지낸 ‘술꾼’님들 많으실 테지요.아침이면 쓰린 배 어루만지는 술꾼들이 종종 찾는 숙취해소 음식으로 단연 콩나물국이 최고입니다.(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정보'지만 해장술은 ‘마취효과’에 의한 일시적 착각일 뿐, 숙취해소를 되레
북두칠성을 노트 위에 올려놓으니 별은 동그라미가 되었다. 땅위에 올려놓으면 별은 따뜻한 방으로 변할 것이다. 동그라미 일곱 개. 형상화한다는 거창한 말을 썼지만 동그라미 일곱 개를 붙여 놓는 것 이상의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건 우리 마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