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강창보 선생 민족운동일대기(1)

이 글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강창보 선생의 민족운동 일대기를 그의 동생 강창거 선생이 기록한 것이다. 강창거(姜昌擧) 선생은 일제강점기 제주농업학교 재학 때 동맹휴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다. 이 자료를 제공해 준 고성화 선생에게 감사드린다.[박찬식 박사]

▲ 강창보의 동생 강창거 선생이 쓴 강창보선생투쟁사 원고 표지
선생은 1902년 제주도 성내(현 제주시)에서 서민의 가정의 장남으로 탄생하였다. 그 당시 우리 조국은 일제와 제정 러시아ㆍ청국 등 주변 3대 강국이 조선 침략의 패권을 다투어서 삼파전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조정 내부에는 집정권(執政權)을 가지려는 세력 분쟁으로 국민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국가의 주권은 완전히 상실한 때였다.

강창보 선생의 가정은 봉건제도하의 온갖 차별적 대우와 압정에 신음하면서도 자작농으로서 일가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가정환경이 선생으로 하여금 시종일관 공산주의자로서 일생을 바치게 한 토양이 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일곱 살 되던 해에 비로소 한문서당에 입숙(入塾)하여 13년 동안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독하였으니 한자에 대한 조예가 보통 정도가 아니었다. 특히 성장기에 달한 그에게는 제주도의 탁월한 한학자 김석익(金錫翼, '耽羅紀年'의 저자)에게 오랫동안 사사한 관계상 선생의 인격과 사상 형성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하여야 옳을 것이다.

1924년 봄에는 상투를 자르고 새로운 학문과 새 문화를 흡수하기 위하여 제주공립보통학교(2년제, 주 : 제주북초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바로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으로 노농정권(勞農政權)이 수립되고, 1919년에는 그 영향을 받아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난 때이라 이러한 자극이 그의 향학열을 가일층 고무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1921년에는 일제 하급관리의 등용문인 농업학교를 중도 퇴학하여 명신학교(明信學校)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하였으니, 여기에 명신학교 설립을 잠깐 언급한다면 선생이 학교를 옮긴 동기와 의의 및 사상적 배경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관제(官製)의 보통학교는 1면(面) 1교(校) 제도였을 뿐만 아니라 수용 인원수가 겨우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우후죽순처럼 밀려드는 지망자들을 받아들일 시설이 부족했으며 거리를 방황하는 학생 수는 성내만도 수백 명에 달하였다. 

 
▲ 강창보 선생이 1928년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 사건으로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되었을 때 형사과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
이러한 사태를 차마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양심적인 인사들과 민족주의 사상에 불타는 청년들은 김철준(金哲俊)ㆍ송전일(宋銓一)ㆍ김민형(金玟衡)ㆍ박교훈(朴喬勳) 등이 중심이 되어 자산가는 시설자금과 교사(校舍) 용지를 제공하고 지식인들은 교원으로 하고 김응두(金應斗)를 교장으로 하여 1921년에 비로소 개교를 하게 되었다(주 : 한상호ㆍ김택수ㆍ최정숙ㆍ강평국ㆍ김명식ㆍ최남식 등 신진 청년들이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민족의식이 투철한 청년들로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뒤에 제주도 항일운동의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여기에 병설된 보습과는 20세 전후의 만학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제주도 각처로부터 백여 명이 응모하였다. 포옹력이 넓고 조리 있는 좌담을 잘하는 그는 보습과에 들어가자마자 선생님과 학생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되었으며, 교내에서는 학생 대표가 되고 방과 후에는 그를 흠모하는 교우들과 언제나 자리를 같이 하였다.

학교에 다니면서 마을(용담리)의 어린 소년들은 규합해서 소년친목회(少年親睦會)를 조직하였으니 이는 제주도에서는 강령과 규약을 갖춘 처음의 소년단체의 발족이었다. 

이 소년회가 2년 후에는 그 명칭을 소년선봉회(少年先鋒會)로 바꾸었으니 이는 곧 그 당시 소비에트의 소년단체인 ‘아방갈드’(소년선봉대, 주 : 불어로 전선을 넘어 적진으로 보내는 척후병, 전위를 의미하는 군사용어)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것은 선생이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환ㆍ발전하는 과정의 구현의 하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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