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귀리, 헌마공신 김만일의 마을

비가 갠 이후라 맑고 투명한 하늘 아래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한 날씨에 차를 몰아 의귀리 마을로 향했다. 제주시내에서 조천과 남원을 연결하는 남조로(1118번 도로)를 따라 40분 정도 운전하면 남원에 도달하기 전에 의귀리 마을에 이른다. 서귀포시 남원읍 중산간 마을에 위치한 이 마을은 410여 가구에 주민 1200여 명이 거주하며 도내 마을 중에서는 최대 재배 면적을 자랑하는 귤 주산지다.

▲ 의귀리 마을, 초등학교 인근으로 이 마을 중심지다.  ⓒ 장태욱  

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의 고향마을

의귀리 마을의 역사는 김만일(金萬鎰)을 빼고는 말할 수가 없다. 이 마을의 설촌 설화도 그와 깊은 연관이 있다.

중국의 명나라 지관이었던 호종단이 "제주에 인물이 날 수 없도록 맥을 끊으라"는 명나라 왕의 명을 받들고 제주로 들어왔다. 호종단은 제주에서 지맥을 살피며 맥을 끊는 중 의귀리 인근 수망리 마을에서 경주김씨 김이홍과 연을 맺게 되었다.

김이홍이 천운을 타고 난 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호종단은 김이홍에게 지금의 의귀리에 집터를 정해주어 살게 했다. 그리하여 의귀리 마을이 설촌된 것이다. 의귀리로 이주해 온 김이홍은 명종 5년(1550)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낳은 아들이 말을 길러서 부귀영화를 한몸에 받았던 김만일이다(어떤 기록에는 제주목사가 이 일대를 지나다가 김이홍에게 집터를 정해줬다고도 한다).

왜란과 호란을 겪는 와중에 조정에서는 말이 많이 필요했다. 그때마다 김만일은 수백 마리씩 수차례 바침으로써 국난 극복에 기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헌마공신(獻馬功臣)으로 칭송받았고, 인조 6년(1627)에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를 제수받았다.

▲ 김만일의 묘, 서남모루에 있는 헌마공신 김만일의 묘다. 경주김씨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 장태욱

의귀리(衣貴里)라는 마을 이름도 김만일이 왕에게 높은 관직을 받고 귀한 관복을 입고 돌아왔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의귀리에는 지금도 김만일 본인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의 무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609년 현재 남원읍 일대가 행정구역상 정의현의 중면(中面)이 되었을 때 면사무소가 의귀리에 자리잡으면서 이 마을은 줄곧 현 남원읍 지역의 행정중심지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1915년 도제가 실시되면서 전도 15개소의 경찰관 주재소 중 한 곳을 의귀리에 두었던 것을 보면 행정 중심지로서 이 마을의 기능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3이 발발하기 전 이야기다.

민초들,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4·3의 광풍은 의귀리 마을을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1948년 11월 예고도 없이 마을을 습격해 들어온 토벌대는 방화와 학살을 일삼았다. 주민들은 산으로 들로 피해 다니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집에 남아 있거나 냇가의 궤에 숨어 있다 잡힌 자들은 여지없이 총살당했다.

1948년 12월 의귀국민학교에 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하면서 주민 학살의 횟수와 피해는 더 늘어만 갔다. 군인들은 무장대가 자신들을 습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하기까지 했다.

▲ 의귀초등학교, 4.3당시 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던 장소다. 이 곳에 수용된 주민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 장태욱

250여 명의 희생자를 낳고 완전히 폐허가 된 의귀리는 1950년경 재건이 되었다. 폐허와 이산의 아픔을 겪은 주민들은 마을로 복귀하여 새 삶을 일구기 시작했다.

70년대 귤이 도내에 보급되면서 귤나무가 의귀리 전체를 덮었다. 외환위기 이전 귤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영화를 뒤로하고 귤 농업도 이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의귀리 마을이장 김용호(53)씨를 만났다. 소박하고 소탈해 보이기도 하고 연세에 걸맞지 않게 얌전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을 자랑을 좀 듣고 싶었다.

"과거에는 자랑거리가 많았는데 지금은 자랑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도내 최대의 귤 재배지였는데, 귤 시세가 형편이 없어서 농민들이 살 길이 막막합니다.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10여 년 전 이 마을에는 미국 정부와 협의 하에 미국으로 수출할 귤을 재배하는 수출단지가 조성된 적이 있었다. 수출단지에서 생산한 귤이 아직도 미국으로 수출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수출단지 사업이 중단된 지 오랩니다. 우리 귤이 미국에서 가격경쟁력이 약하고, 대미 수출절차가 까다로워서 수출 오퍼상에서 물량주문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수출해서 얻는 이익보다 내수시장으로 판매해서 얻는 수익이 높을 때가 많아서, 농민들도 수출에 대한 의욕을 잃었습니다. 되돌아보면 한국 정부가 미국의 개방 압력을 극복할 길은 없고, 한국농민들의 저항은 잠재워야겠기에 수익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색내기로 수출단지를 조성했던 거예요."

▲ 귤 과수원, 의귀리는 최대 귤 재배지이다. ⓒ 장태욱

벼랑 끝에서 보이는 희망

최근에 이장에 취임한 김용호 이장은 앞으로 2년 임기로 마을을 위해 봉사를 하게 된다. 농촌이 어려운 시기에 마을을 위해 일하고 있는데, 재임 중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다.

"우선 마을 향토지를 꼭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말(馬)을 주제로 한 테마마을을 만들 계획입니다."

말을 테마로 한 마을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우리 마을은 해변을 접하지 못한 마을입니다. 게다가 북쪽으로도 한라산과 매우 멀어요. 단순히 자연환경을 이용한 관광상품을 개발하기에는 불리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이 헌마공신 김만일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마을이 과거 제주도 육마의 중심지였다는 상징성으로 인해 말을 이미지화한 관광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마을 여러 주민들의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말 박물관도 유치하고 싶고…."

김용호 이장이 건넨 마을 총회자료집 안에는 테마마을에 대한 주민들의 구상이 빽빽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김만일 생가 터나 묘역 등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는 일이나 말문화박물관이나 김만일 기념관 등을 건립하는 일 등 지방정부가 나서야 가능한 사업들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트래킹이나 마차타기와 같은 체험 관광 상품 등 주민이 나서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사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의귀리 김용호 이장을 만나 마을의 현황과 마을의 발전 방향에 대해 물었다.  ⓒ 장태욱 

"이런 일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우선 활발히 자료를 수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업에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행정당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이제 변해야 산다는 주민들의 의식전환입니다. 모든 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예전에는 자랑거리가 많았는데 이젠 자랑할 게 없다는 김용호 이장의 대답이 화두처럼 머리에 남았다. 농민들이 그만큼 자부심을 잃어간다는 말이다. 민생을 살피는 지위에 있는 자들 그리고 새롭게 국민의 심복이 되고자 나선 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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