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으로 파괴된 선비의 마을은 관광지로 거듭나고

   
 
▲ 명도암 입구 동부산업도로 차도 한복판에 서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명도암 마을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다.  ⓒ 장태욱
 

제주시내에서 동부관광도로를 따라 6km쯤 동쪽으로 가면 대기고등학교와 봉개동사무소가 있는 봉개마을에 이른다. 이곳을 1km쯤 더 지난 곳에서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차도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명도암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다. 그 곳에서 우회전해서 동산을 오르면 명도암 마을에 이를 수 있다.

마을 이름의 유래, 명도암 김진용 선생

주변에 '명도암관광목장'과 '명도암유스호스텔'을 끼고 있기 때문에 마치 관광단지의 이름인양 인식되고 있지만, 명도암은 조선중기에 이 마을에 자리를 잡은 김진용의 호에서 유래한 마을이름이다.

명도암 김진용은 17세기 초 제주 대정현에 유배당했던 간옹(艮翁) 이익(李翼1579-1624)의 제자였다. 간옹 이익은 광해군 7년(1615년)에 대북파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서 죽게 한 것과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것에 반대하는 극언극간의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던 인물이다.(간옹 이익은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李翼)과는 동명이인이다.)
  

   
 
▲ 마을 안길 김진용 선생이 생전에 생활했던 곳으로 향하는 길이다.  ⓒ 장태욱 
 

이익은 제주 유배 도중 제주도민들에게 예법과 학문을 전수하며 후학 양성에 매진했는데, 김진용은 고홍진 문영준 등과 더불어 이익이 배출한 걸출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이다.

선조 38년(1605) 태어나서 간옹 이익의 가르침을 받은 김진용은 인조13년(1635)에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인조21년(1643)에 경학전강에 급제하여 숙녕전 참봉에 추천되었다. 하지만 김진용은 출사를 사양하고, 귀향하여 후학육성에 힘을 쏟았다.  
  

   
 
▲ 유허비 안세미오름 자락에는 명도암 김진용 선생의 후손들이 그가 기거했던 곳에 세운 유허비가 있다.  ⓒ 장태욱
 

효종 9년(1658)에 제주로 부임한 이회 목사는 남달리 학문을 중시하여 김진용으로 하여금 인재를 육성하게 하였고, 김진용과 더불어 장수당이라는 학사를 창건하였다. 장수당은 후일 귤림서원의 효시가 되기 때문에 제주에서는 최초의 사학으로 자리매김된다.

김진용은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 현종4년(1663)에 생을 마감했는데, 그로부터 약 170년이 지난 순조31년(1831)에 이예연 목사가 김진용의 업적을 기려 그의 위폐를 영혜사에 모셨다. 그러다가 헌종15년(1849)에 위폐를 향현사로 옮겨, 고득종과 더불어 향사하고 향현으로 받들어 왔다.  
  

   
 
▲ 샘물 김진용 선생이 기거했던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샘물이 있다. 이 샘물은 작은 동굴 속에 있다.  ⓒ 장태욱
 

명도암(明道庵)은 후학들이 김진용을 가리켜 '길을 밝힌 사람'이란 의미로 붙인 호인데, 나중에는 그가 생활했던 이곳의 마을이름이 되었다. 이 마을에는 김진용의 후손들인 광산김씨 대교동파에서 그의 살아생전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기거했던 곳에 세운 유허비가 남아 있다.

제주 4.3의 광풍은 스승의 마을도 휩쓸고

그가 생전에 기거했던 안세미 오름 자락은 지금 찾아가 보면 주변이 매우 한적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들게 하는 곳이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농토들이 마을의 배경을 이루고, 가까운 곳에는 샘에서 사철 맑은 물이 솟아난다. 하지만 제주도 중산간 마을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한 없이 평화롭기만 한 이곳도 4.3의 광풍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 밧세미오름 이 마을 뒷 쪽에 자리잡은 오름이다. 무척 평화롭게 보였다.  ⓒ 장태욱
 

45년 해방을 전후로 명도암 마을에는 약 73호의 가구에 주민들이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4.3사건이 일어나면서, 1948년 11월 20일 마을 전체가 토벌대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주민들 중 일부는 인근에 있는 도련마을로 피신했고, 다른 이들은 산 쪽으로 피신했다. 명도암에 있는 안세미 오름과 밧셈이 오름 사이에는 과거 일본군들이 파 놓은 진지동굴이 있었는데,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이 동굴에 숨어 지낸 주민들도 많았다고 한다.
  

   
 
▲ 4.3평화공원 거친오름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4.3평화공원. 4.3사건으로 인해 상처를 당한 도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 장태욱 
 

명도암 마을의 역사적 아픔에서 연유했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마을 가까운 곳에 제주4.3평화공원이 설립되었다. 4.3과정에서 제주인들이 체험했던 역사적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된 이 평화공원은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각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들러 가는 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이 비운 자리는 노루들이 채우고

명도암 마을에는 안셈이 오름과 밧셈이 오름 이외에도 거친 오름 절물 오름 민 오름 등 많은 오름이 있다. 그런데 4.3 이후 오랫동안 이 마을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간 이 일대에서 노루들이 크게 번식해서 주변의 오름들이 노루 서식지가 되었다. 노루들에게도 옛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 걸까? 이 마을을 지나다가 길가에서 노루를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 관광목장 마을에 자리잡은 명도암관광목장  ⓒ 장태욱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지형이 노루들이 서식하는 예쁜 오름의 형세와 맞물려 최근에는 명도암 주변이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일찍이 개장한 절물 휴양림에는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는다. 그 결과 이 마을에 '명도암관광목장'이나 '명도암유스호스텔'등의 관광 숙박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 절물 휴양림 절물오름에 절물휴양림이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장태욱 
 

금년 8월에는 '노루생태관찰원'이라는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광관시설이 문을 열었다. 주변 오름에 노루가 많기 때문에, 오름과 노루를 동시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다.  
  

   
 
▲ 노루생태관찰원 인근 오름에 서식하는 노루들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해 만든 야생 동물원이다.  ⓒ 장태욱
 

노루생태관찰원은 거친 오름 주변의 약 15만평 부지에 조성되었다. 오름을 돌면서 그 안에 서식하는 노루들을 관찰할 수 있는 트래킹 코스가 갖춰져 있다. 현재 거친 오름에는 100여마리의 노루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코스를 걸어서 구경하려면 약 1시간 반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는 관광객들을 위해 야생노루 상시관찰원도 준비되어 있다. 
  

   
 
▲ 노루 명도암에서는 흔히 노루를 만날 수 있다.  ⓒ 장태욱 
 

이 마을에 들어서면 옛 스승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광풍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와중에 폐허가 되었던 이 마을을 되살리기 위해 나섰던 노루들이 고맙기만 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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