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화가의 거장 '한묵' 재불원로화가, 이중섭 예술제를 찾다

▲ 6일 오후 열린 이중섭 세미나가 열린 서귀포KAL호텔
"중섭이의 친구로서, 그의 예술과 인간적인 면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합니다."

제주에서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 김정희(1786~1856 )가 세상을 뜬지 꼭 100년만에 제주에서 불꽃같은 삶을 불태웠던 천재화가 이중섭(1916~56)이 불멸의 예술혼을 남긴 채 스러져 갔다.

이 둘은 5가지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당대에 시대가 알아주지 않았던 천재였던 점, 그리고 한 사람은 유배로, 다른 사람은 피난으로 제주와 인연을 맺었다.또 추사체를 완성한 김정희 '세한도'와 소의 그림 이중섭 모두 불후의 명작을 제주에서 완성했다. 

아내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던 추사와 달리 이중섭의 죽음을 그의 아내가 지켜보지 못하는, 추사와 중섭 모두 아내를 끔찍히 사랑하는 남편이었던 점도 비슷하다.

그리고 이 둘은 사후에야 후대에 의해 제대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절친한 벗이 있었다.

   
 

 
 

제10회 이중섭예술제가 열린 서귀포시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반가운 유명 방문객이 있었다. 재불원로화가 한묵(93.이중섭미술상 창립의원).

젊은 시절 이중섭과 동고동락했던 그림 벗이다.

6일 오후 4시부터 서귀포 칼호텔에서 열린 '이중섭 세미나'장을 찾은 그는 공식 세미나 일정이 끝나고 잠시 연단에 섰다.

친구 이중섭에 대한 기억을 전해달라는 주최측의 요청에 못이겨 나온 그는 안타까움이 북받쳤는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내내 '중섭'이라고 불렀다.

"중섭이를 생각하니까, 가슴이 미어집니다. 밤새 해도 모자랄 숱한 얘기가 있지만 다 할 수가 없어요"

사별한지 50년 넘은 그림 벗 중섭과 얽힌 이야기를 한묵 화백은 드문드문, 하지만 또박또박 해나갔다.
 

▲ 이중섭의 젊은시절 친구인 한묵 재불원로화가
"이중섭과 일본에서 한때 같이 살았어요. 부산시절, 원산시절을 같이 보낸거지요. 동경시절에 내가 가와다에 있을 때 중섭이는 귀족 자손들이 많이 다니는 문화학원에 다녔습니다".

"원산해수욕장에서 해수욕장에서 놀던 시절이 생각난다"는 그는 "중섭이가 원산살때 기차로 한두시간 거리에 떨어진 원정리에 살았다"며 함께 고뇌를 짊어졌던 친구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1956년 건강이 좋지 않아 간장염으로 고생했을 때 그는 직접 약을 사다주며 중섭을 돌보는 등 적지 않게 안타까운 시절도 있었다. "결국 중섭이가 떠날 때 내가 묻었어요"

결국 그해 9월 6일 영양실조와 간장염으로 인해 숨을 거뒀을 때 그는 직접 친지들과 함께 시신을 화장하고 망우리 공동묘지가 아닌 '가슴' 속에 중섭을 묻었다.

"3년전 조선일보사에서 불러줬어요. 순간 잊고 있던 중섭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납니다. 중섭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요."

"가슴이 무겁다"는 그는 이야기 도중에 몇번이나 목소리가 잠겼다.

"서귀포에 우연히 오게 됐는데, 원산해수욕장에서 헤엄치며 놀던 생각이 났어요. 서귀포와는 깊은 인연이 있지요."

제주에서 만난 기억은 없지만 "바다를 바라보면 중섭이 생각을 하게 됐다"며 솔직한 단상을 털어놨다.

그는 "서귀포에 와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허연 물결이 밀려들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옛날 바다에서 놀던 생각이 난다"며 "허연 파도가 마치 중섭이의 손길 같았다. 중섭이가 손을 흔드는 것 같다."며 몇번이나 속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내내 감격에 겨웠는지 그는 "중섭이를 대신해서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중섭이 친구로서 그의 예술과 인간적 측면에서 연구를 많이 해 준데 대해 감사합니다"라고 거듭 고마움의 뜻을 전했다.
 
한묵 화백은 "옛날에 일기를 쓰는데 단문을 쓰는 편이어서 어느날 '바다'라는 시를 쓴게 생각이 난다"며 "오래됐지만 기억을 되살리며 바다를 읊어 보겠다"며 즉석 시낭송으로 이날 자리를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낭독이 끝나자 "중섭이 때문에 쓴 글"이라고 말하고는 연단에서 내려왔다.

   
 
 
'바다,
바다는 젊은이의 가슴인가
그 숨결은 드높아 억세게 끌어다가는 왈칵 달겨드는 뜨거움이여
천기를 솓굿치려는 바람을 안고서 다하지 못하는 괴로움이여
안경을 바다는 알알이 부서지고 마는 안타까움이여
오 그것은 천기에 솟기치는 바람을 안고서 다하지 못하는 괴로움이여
그러나 바다는 항시 푸르러, 항시 부풀어 한결같이 고함쳐 달려든다' 

한편 한묵 화백(1914-)은 한국이 자랑하는 걸출한 추상회화의 거장으로,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 우리 화단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기하학적 추상 작가로 꼽힌다. 한국화단에 추상회화의 뿌리를 내리게 한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이 깊어서 좀처럼 동요되지 않는 큰 인간성으로 화단에선 '대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묵의 화력(畵歷)은 1951년의 1·4후퇴 이후이다. 일본 천단(川端) 미술학교에서 수학을 마친 그는 해방 후 이북에 거주하다가 1·4후퇴와 함께 다른 동료화가들과 더불어 월남했다.

그 후 임시수도에서 『기조회(其潮會)』창립회원(1952년)으로서 작가활동을 시작했고, 환도 이후에는 『모던아트 협회』의 멤버로써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47세, 자기 세계에 안주할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진정한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그의 예술에 대한 태도는 진지하고 이상주의적이다. 절대적이며, 순수하고 지고(至高)한 예술은 생명과도 같이 값 있는 것으로 여긴다.

▲ 세미나장을 찾은 원로 화가와 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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