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의 '내 사랑, 제주']서귀포 걷는 길(중)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갈치국과 오분작 된장찌게로 배가 잔뜩 부른 여자들은 식후경으로 천지연 쪽으로 발길을 옮겨놓았다. 서귀포 부두에서 천지연으로 휘어서 접어드는 길은 걷기에 일품이다.

나는 이곳 출신으로서 늘 못마땅한 게 그 아름다운 천지연길을 꼭 대형 관광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휘익-------지나쳐놓고서도 서귀포를 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귀포야말로 '천천히 걸어서' 휘적휘적 둘러봐야 하는 곳이다. 서귀포는 걷는 이들에게만 자기의 속살을 슬쩍 내보이고, 하룻쯤 머물러야 마음을 열어줄 것이다.

자, 그럼 준비들 되신 거죠?

천지연 입구에서 천지연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입장료 내는 곳은 걍 지나쳤다. 돈 안 내는 곳도 아름다운 곳이 워낙 많은데 돈 내고 입장료 받고 그런 번거로운 절차가 싫어서) 외돌개가 있는 남성리 쪽으로 방향을 잡아든다.

   
 
 
그 산책로 길에 동백이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져' 있었다. 떨어진 동백 옆에 동백꽃을 머리에 어정쩡하게 꽂고서 약간 어색한 미소를 날리는 분은 한의사 이유명호 선배다. <꽃피는 자궁>에 이어서 얼마전 불후의 명저 <뇌력충전>이라는 책을 펴내고 룰루랄라 여행을 즐기고 있는, 서명숙이 젤로 좋아하고 따르는 언니다.

근데 외모는 언니가 아니라 동생 같다는 점이 가장 못마땅하고 불쾌한 점이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먹고, 술을 절제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으려니, 희망을 갖게 만드는 점도 있지만.

   
 
 
서귀포 부두가 아닌 천지연 쪽 방파제가 있는 곳이다. 예전엔 이곳에서 우리 치마를 동동 걷어서 팬티춤에 꼭꼭 집어넣고 '고메기'(작은 고동의 일종)를 잡곤 했다. 한참 고메기 잡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면 어느새 발목에 물이 찰랑거려서 허둥지둥 빠져나오곤 했었지.

정박한 배 뒷편에 보이는 것이 새섬이다. 예전엔 사람이 살았는데,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단다. 썰물 때는 방파제를 지나서 걍 걸어서 섬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이곳 방파제에선 초여름부터 사람들이 모여서 회도 먹고 돼지고기도 지글지글 구워먹곤 하는데, 그 맛이 가히 '환상적'이다.

생각해 보라. 신라호텔 무슨 무슨 룸이 이만한 전망과 맑은 공기를 갖고 있겠냐구요. 어릴 적 추억이 몽글몽글, 끝도 없이 솟아나는 장소다.

   
 
 
내 사랑하는 '시인 친구' 허영선과 함께. 검은 모자, 회색 머플러, 회색 바바리의 이 분위기 있는 여자가 바로 내 중학교 때부터의 친구 허영선이다. 그녀는 젊어서는 빼어난 연애시를, 나이가 좀 들어서는 제주 4.3에 관한 절절한 증언시를 발표했다.

남성리로 올라가는 산책로에서는 이처럼 '세계적인 미항' 서귀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걸음이 자꾸만 더뎌진다. 서귀포는 로마처럼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그러니 걸어야 제맛이다.

   
 
 
외돌개로 향하는 길 초입에 조성된 산책로.  바닷가로 내려가게 되어 있어서 혹시 아래 해안까지 주욱 연결되어 있나 했는데 중간에서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래도 여기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외돌개 해안 풍경이 일품이었다.

외로이 걷는 저 여인은 무슨 상념에 빠져 있는 걸까? (혹시 '화장실 대체 어디 있나?' 생각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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