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野'한 이야기] (5) YMCA야구단은 조선 최초의 야구선수 아니다

장마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비 내리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지난 주말에도 비 때문에 야구를 하지 못했는데, 이번 주말에는 할 수 있을 지 걱정입니다. 그라운드에서 야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귀포시에 있는 '야구 명예의 전당'을 다녀왔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걸려있는 사진들과 책을 보고 왔는데요, 아직 못가보신 분들은 아이들과 함께 다녀오시면 좋을 듯합니다. 명예의 전당을 다녀온 김에 한국에 야구가 태동하던 시절에 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필자 주> 

▲ YMCA야구단이 경기를 벌이는 장면. 야구 관련하여 현재 남아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입니다. 포수가 마스크를 끼지 않은 채, 서서 수비를 하는 게 인상적입니다.

한국야구위원회가 1999년 발간한 <한국야구사>(유홍락, 천일평, 이종남 공저)에 따르면, 야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Phillip Gillett) 선교사의 지도 아래 황성 YMCA야구단이 결성되었는데, 이 팀은 해체될 때까지 13년 동안 조선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습니다. 영화 (김현석 감독, 송강호, 김혜수, 김주혁, 황정민 등 주연)은 봉건왕조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기에 결성된 조선 최초의 야구단에 관한 이야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재미있게 그린 작품입니다. 

야구의 도입시기와 최초의 야구팀에 관해서는 1905년 YMCA야구단과 관련한 내용이 오래도록 정설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YMCA야구단이 결성되기 훨씬 이전에 조선에 야구가 소개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서재필, YMCA야구단에 앞서 국내에 야구를 소개

 지난 2011 년에 중앙대 손환(孫煥) 교수와 이가람 씨는 ‘한국 최초 야구 경기에 대한 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을 한국체육학회지에 발표하였습니다. 논문에 따르면 1896년 4월 25일에 이미 우리나라에서 야구경기가 벌여졌고, 이 소식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의 영문판 ‘The Independent’지에 이와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가 실린 4월 28일자 신문은 “4월 25 오후 2시 30분,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 근처의 공터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팀 이름 : Seoul Athletic Club)과 미국 해병대원들(팀이름 : U.S.S. Yorktown)이 야구 경기를 벌여, 해병대 팀이 1점 차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신문은 이들 팀들이 6월 23일에 재차 벌인 경기 소식도 전하는데, 놀랍게도 Seoul Athletic Club 팀의 선수 명단에 조선 사람의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미국인 팀의 6번 타자 겸 중견수로 출전한 선수가 Philip Jaisohn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독립신문> 발행인인 서재필 박사의 미국식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선수는 YMCA야구단 선수들이 아니라 서재필이라는 겁니다.

▲ YMCA야구단이 훈련원 뜰에서 야구경기를 벌이는 장면.

그렇다면 서재필 박사는 어떻게 조선인이 야구를 시작하기 전에 미국인들 틈에서 선수로 참가하게 되었을까요? 사연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개화 지식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야구를 품다

서재필은 1864년 전남 보성 출생하고, 1882년에 과거에 급제합니다. 그는 일찍이 개화사상에 매료되었고, 1883년 일본으로 군사유학을 떠나 군사와 관련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1884년 5월에 귀국하여, 고종을 만난 자리에서 사관학교 설립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서재필은 1884년에 박영효, 김옥균 등과 더불어 갑신정변을 일으켰는데, 그는 당시 병졸을 지휘하는 행동대장 역할을 맡음과 동시에, 일본의 지원을 기대하며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와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갑신정변을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역모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재필의 부모와 아우, 아내는 목숨을 잃었고,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을 거치며 고단한 망명생활을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그는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가구상회에서 일을 하고 교회에서 영어를 배웠습니다. 워싱턴 소재 미 육군도서관에서 동양서적 사서로 근무하게 되어 조선인 최초로 미국정부의 관리가 되었고, 조지워싱턴대 의과대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필립 제이슨(Philip Jason)이라는 미국식 이름도 얻었고, 미국 시민권도 획득하였으며, 미국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도 하였습니다. 야구도 이 기간에 익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조선조정은 서재필에게 귀국에서 조정에 입각할 것을 권했습니다.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이자 조선 조정은 개화지식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주미조선공사관 자격으로 1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가 귀국 후 시급한 과제라고 여겼던 것은 계몽과 개화였습니다. 그래서 조정의 지원을 받아 신문사를 설립하였으니, 그게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입니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호가 발간되었는데, 야구와 관련된 기사가 4월 28일에 보도되었으니 발간 초기에 좋은 흥밋거리를 찾은 것으로 보이네요. 어쩌면 흥미 있는 기삿거리를 만들어야할 입장에서 서재필이 능란한 사교술을 발휘하여 야구경기를 주선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서재필과 암스트롱 부인은 한성의 사교가에서 인기 넘치는 부부였다고 합니다.

당시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외에도,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또,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척결하기 위해 독립문을 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재필의 계몽활동이 조선의 수구파 정부와 러시아 일본 등의 눈에 거슬렸고, 결국은 반대세력의 추방운동으로 1898년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훗날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사재를 털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고, 해방 후 잠시 귀국했다가 국내 정세가 혼란하게 전개되자 미국에 돌아가서 1951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한국인 최초 미국관료', '한국인 최초의 전문의', '한국인 최초로 미국인과 결혼', '한국인 최초로 민간신문 발행인' 등 서재필의 이름 앞에는 '한국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닙디다. 그만큼 개화 지식인으로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한국인 최초 야구선수'라는 수식어가 추가될 차례인데요, 이는 당시에 야구가 곧 개화를 의미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장태욱

<제주의소리/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